▲청주형무소 한국전쟁 당시 청주형무소
청주교도소
과포화된 감방, 잠조차 허락되지 않던 여름
"오늘도 편히 자기는 글렀구만."
투덜대는 이에게 감방장이 인상을 썼다. 다시 입감한 이의 속이 문들어질 판인데, 그 상황에서 잠자리를 얘기했으니 감방장의 얼굴이 구겨질 만했다.
그렇지만 머쓱해진 이의 입이 나올 만도 한 상황이었다. 청주형무소 재소자 정원이 500명에 불과했는데, 6.25 당시 수감자가 1600명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미군정 시절 포고령 2호 위반자가 급증했고, 정부 수립 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양산됐기 때문이다.
청주시 탑동에 위치했던 청주형무소는 과포화 상태였다. 남자수용소 3개 동, 여자수용소 1개 동, 공장 5개가 있었는데, 이 시설로는 1600명을 수용하기가 어림없었다. 이런 이유로 교도소 안 공장 하나를 비워 임시 감방을 만들고, 그곳에 3년 이하 형을 받고 취업 중인 재소자들을 수용하였다.
또한 수용소 당국은 1950년 1월부터 교도소 담 밖 북쪽에 벽돌 건물 2층으로 감방 60여 개를 신축 중이었다. 하루라도 일찍 완공하려고 일요일도 없이 작업하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재소자들은 미결사(未決舍), 기결사(旣決舍)를 가릴 것 없이, 꽉 조여 앉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야 했다. 다리를 뻗고 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교대로 잠을 자거나, 심지어는 감방 안에 줄을 맨 후 양쪽 다리를 들어 그 줄에 오금쟁이만 걸친 채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자기도 했다.
감방 안은 하지가 지난 여름철이라 원래 무더운 때이기도 했거니와 그 많은 사람들의 체온에서 뿜어 나온 열기로 달구어져 섭씨 35도에서 40도를 웃돌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시루에 떡을 찌듯 더웠다(홍두표, <나의 여운>, 2006).
하루하루가 지옥살이 상황에서 6.25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6월 28일, 부천형무소에서 재직 중이던 정태원씨가 왔다. 그가 전한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서울은 이미 인민군 손에 들어갔고, 한강 다리도 벌써 끊겼다는 것이다. 법무부 당국자들은 일선 형무소에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은 채 모두 피난하였다.
마포교도소 사정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소장과 간부들이 말단 직원들에게 교도소를 지키라고 명령해 놓고는 자신들은 슬금슬금 도망쳤다고 한다. 그 후 인민군이 정문을 덮치는 바람에 교도소 안에서 근무하던 다수의 말단 직원들만 죄수들에게 맞거나 인민군 총에 죽었다는 것이다. 이에 계호과장과 직원들은 비상 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1. 전 직원은 생사를 같이한다.
2. 지금부터 계엄사령부의 지시를 받는 등 공무를 수행해야 할 소장과 서무과장을 제외하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정문을 나가지 못한다.
3. 간수부장 3명과 선발된 간수 10명은 각기 2개 조로 나뉘어 주·야 교대로 정문 출입을 책임지고 통제한다.
별 하나 단 검은 세단, 정문 앞의 위수사령관
1950년 6월 29일 오후 10시경, 차량 번호판에 별 하나를 단 검정색 세단차가 정문 앞에 나타났다. 카빈총을 어깨에 멘 헌병 하나가 내리더니 "어이 간수! 문 열어"라고 했다.
당시 청주형무소 표문(정문)에서 근무를 하고 있던 홍두표가 "누군데 문을 열라고 합니까? 누군지 신분부터 밝히시오"라고 답했다. 그러자 헌병은 카빈총을 표문 앞으로 쑥 들이댔다. "감히 누구 앞에서 반항하나! 당장 열지 않으면 쏘겠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지만 무법천지였다.
그때 차 안에서 "헌병! 잠깐만" 하는 소리와 함께 중령 계급장을 단 군인 하나가 나왔다. "소장 있나?"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란다. 그제야 헌병도 총을 거두어 어깨에 얹었다. 그들은 소장과 면담하고 나서 30분 정도 후에 되돌아갔다. 당시 세단차에 탔던 이는 충청지구 위수사령관으로 제2사단장 이형근 준장이었다.
당시 이형근 준장은 1950년 6월 26일부로 채병덕 참모총장에 의해 2사단장 직에서 면직되었다. 전선에서의 2사단 지휘권을 제7사단장에게 맡긴 이형근은 이후 1950년 7월 8일 전남편성관구 참모장으로 발령됐다. 이형근은 전남으로 가는 도중 청주형무소에 들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형근은 청주형무소에 들러서 청주형무소장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당시는 계엄 상태였기에, 단순히 상의가 아닌 지시와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형근이 정치·사상범에 대한 처리를 지시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형근이 다녀간 이후, 충북지구 CIC와 2사단 제16연대 헌병대가 청주형무소를 출입했다. 충북지구 CIC(대장 양문석 중령)가 청주형무소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즉 군이 청주형무소 재소자의 총살을 명령한 것이다(진실화해위원회, <대전·충청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2010).
화당 다리에서 벌어진 첫 집단 학살
'기상' 소리에 홍두표가 눈을 뜬 것은 6월 30일 오전 2시였다. 헌병대에서 군인수 36명을 이감시키려 하니 즉시 호송 준비를 하란다. 당시 청주형무소에는 여순사건으로 징역 15년, 20년, 25년 등을 선고받고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된 군인수 60명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진 후 형무소 내 공기가 살벌한 가운데 군인수 일부를 이감한다니 형무관들은 한숨을 쉬며 안도했다.

▲화당다리 청주형무소 재소자가 최초로 학살된 청원군 남일면 화당리
충북역사문화연대
군인수를 한 명 한 명 불러 손에 수정(手錠, 수갑)을 채우고 포승을 풀었다. 이들을 태운 트럭은 고은삼거리에서 2시 방향으로 향했다. 남일면 화당리 화당 다리에 멈춘 트럭은 재소자들을 토해냈다.
트럭 엔진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에 동네 개들이 컹컹 짖었다. 헌병대원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은 36명을 학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용한 마을에 천둥소리가 났다. 총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급하게 가마니를 벽에 덧댔다. 당시 학살 과정에 대해 남일면 화당 2리 주민 정상희씨가 2005년도에 입을 열었다.
"1950년 전쟁이 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앞으로 트럭 두 대가 들어왔다. 사람들을 굴비 엮듯 꼼짝 못하게 묶어 개천 제방 아래로 걸어가 앉거나 서 있거나 했는데, 따발총인지 따르르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가 심해 가족이 다칠까 봐 아버님이 가마니를 가져와 벽에다 대고 막고 있었다. 총소리가 잦아들어 개울가로 가보니 형무소 재소자들이 입는 푸른 옷을 입은 사람들이 누워있었다.
경찰과 군인들은 화당 다리에서 재소자들을 더 죽이려고 했으나 워낙 큰 길 가이고 민가가 접해 있어 트럭을 돌렸다. 경찰과 군인들은 재소자들을 학살한 후 시신을 묻지도 않고 그냥 가버렸다. 주민들은 시체들이 썩자 쇠스랑으로 찍어 개천가에 파묻었다. 이후 비만 오면 팔뚝이 흘러 다니고 뼈가 많이 굴러다녔다고 한다." - 충북대책위, <기억여행>, 2006.
화당 다리에서의 학살이 있은 지 이틀 후인 1950년 7월 2일부터 본격적인 죽음의 굿판이 벌어졌다. 충북지구 CIC의 지휘하에 헌병대가 포승줄을 가득 싣고 와서 남아있던 여순사건 관련 재소자 24명과 포고령 2호 위반자 중 잔여형기가 긴 재소자부터 인도를 요구하였다.
이에 청주형무소 서무과 형무관들이 일반사범과 정치·사상범을 분류하고, 계호과 형무관의 일부는 정치·사상범들을 포승줄로 묶고, 일부는 이들을 청원군 고은리 분터골 등 총살장소까지 호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형무관 윤덕수의 증언에 의하면 광목과 재소자복 원단을 찢어 재소자들을 뒷결박했다.
충북지구 CIC 지휘하에 제16연대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의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 이상의 정치·사상범들을 1950년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4일 동안 청원군 남일면 쌍수리,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낭성면 도장골, 그리고 가덕면 공원묘지 등으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도장골 봉분 훼손되기 전의 매장지(봉분)-2007년
충북역사문화연대
이름으로 남은 사람들
김순도는 1949년경 거주지인 충북 괴산군 사리면 방축리에서 연행되었다. 김순도는 1949년 12월 20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순도의 처 백인순은 임신 중인데도 면회를 다녀오던 길에 차에서 사산하였다. 김순도는 아내가 사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원군 일대에서 학살되었다.
포고령 2호 위반이나 국가보안법 위반자라고 해서 모두 투철한 이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창섭은 한국전쟁 전 충청북도 괴산군 감물면에서 채주생, 강삼석 등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신창섭의 마을에 좌익 활동을 했던 채방배가 신창섭 등 10여 명의 도장을 빌려 임의로 좌익 관련 단체에 가입시켰고, 이로 인해 신창섭 등 1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창섭은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전쟁 초기에 죽임을 당했다.
청원군 일대 5개 지점에서 학살된 청주형무소 재소자의 유족들은 가족이 어느 곳에서 죽임을 당했는지 모른다. 다만 현장에서 살아나온 이들의 전언이나 목격자의 증언으로 학살된 곳을 아는 경우가 있었다.
석기준은 1949년 철도기관사로 일하던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경찰은 석기준이 운행했던 열차와 열차 밖에서 공산주의 선전 유인물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체포하였다.
석기준은 1949년 10월 11일 청주지방법원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석기준 등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후 가덕면 공원묘지 부근에서 희생되었다고 당시 여자 형무관이 석기준의 가족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남일면 분터골에서 학살됐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수습하러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이도 있었다. 박종한은 청주사범학교 학생으로, 1948년 말경 거주지인 청주시에서 대동청년단 서부지부 단장 강명운의 집을 방화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청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당시 강명운은 청주사범학교 학생들에게 방화혐의를 씌웠고, 박종환은 방화 혐의뿐 아니라 좌익활동 혐의 등으로 청주경찰서에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심하게 당했다. 박종한은 1949년 6월 7일 청주지방법원에서 포고령 제2호 위반과 강도·방화로 징역 7년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박종한이 남일면 분터골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을 들은 박종한의 5촌 박문규와 마을 청년들이 군과 경찰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기 전 박종한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하지만 시신들이 심하게 부어 있고, 부패가 심해서 시신 수습을 할 수 없었다.
일제강점기 의열단원이었던 홍가륵은 한국전쟁 발발 후 청원군 낭성면 도장골에서 총살되었다. 위 사실을 당시 총살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홍가륵의 처 석정순에게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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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또 왔소?" 만기 출소했다 다시 끌려온 재소자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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