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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버린 고된 노동, 사라진 성벽에서 얻은 위로

선진리성과 삼천포, 그리고 침오정과 사천읍성

등록 2025.12.27 19:43수정 2025.12.27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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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사천왜성 사천왜성의 천수대. 내성과 외성을 지나 성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천수각을 이고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 시마즈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으나, 해방 후 파괴되었다. 2006년 공군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는 '충령비'를 세웠다.
▲사천왜성 사천왜성의 천수대. 내성과 외성을 지나 성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천수각을 이고 있던 자리다. 일제강점기 시마즈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으나, 해방 후 파괴되었다. 2006년 공군이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는 '충령비'를 세웠다. 이영천

지난 12월 중순, 경남 사천만의 바닷가. 선진리에 비교적 온전한 왜성 하나가 남아 있다. 이 왜성에서 기나긴 임진왜란 7년의 막을 내린 전쟁이 촉발되었다.

다이고의 꽃놀이 후 히데요시가 죽는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만, 조명연합군이 사로병진(四路竝進)으로 왜군을 압박한다. 특히 이순신과 진린이 남해안의 왜성들을 견제하며 순천왜성에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1598년 11월, 사천왜성의 시마즈에게 순천 쪽에서 한 척의 왜선이 어둠을 타고 닿는다. 바닷길을 건너온 것은, 궁지에 몰린 고니시의 울음 같은 구원 요청이었다.

사천해전 승첩비 1592년 5월,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실전에 투입해 승리한 사천해전을 기념하는 승첩비다. 사진 왼쪽 뒤편이 사천왜성 천수대.
▲사천해전 승첩비 1592년 5월, 이순신 장군이 최초로 거북선을 실전에 투입해 승리한 사천해전을 기념하는 승첩비다. 사진 왼쪽 뒤편이 사천왜성 천수대. 이영천

향불처럼 타오른 불길

시마즈는 망설인다. 군사는 지쳐있고, 철수할 바닷길도 여의치 못하다. 하지만 순천이 무너지면 사천 앞바다도 막히고, 부산으로 이어지는 퇴로는 이순신에게 완전히 장악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남해안은 조명연합군의 바다가 된다. 시마즈는 더는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남은 병선과 고니시의 사위 등 장수들을 불러 전쟁에 나선다.

그 달 19일 새벽, 노량 바다가 환하게 밝혀진다. 치솟는 불길과 연기가, 긴 전쟁에 목숨을 앗긴 조선군을 추모하는 향불처럼 타오른다. 시마즈 함대가 돌파를 시도하자, 조명연합군의 포문이 불을 뿜는다. 바다가 요동치고, 불길이 하늘마저 태웠다.

노량에서 쫓긴 시마즈 함대는 남해 관음포에 갇혀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수백 척 중 겨우 50여 척만이 곳곳이 부서진 채 도망친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이 뒤꽁무니에서 그들을 비웃고 있었다. 간교한 고니시는 그 새벽, 순천왜성에서 그저 불길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전투가 끝난 다음, 생쥐처럼 바다로 줄행랑을 놓는다. 이순신은 전투 중 전사했지만, 일본 역시 내란의 혼돈에 휩싸인다.


선진리성 왜성과 조선 성곽의 흔적이 공존하는 사천 선진리성의 조형물. 사천만의 군사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표석이다.
▲선진리성 왜성과 조선 성곽의 흔적이 공존하는 사천 선진리성의 조형물. 사천만의 군사적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는 표석이다. 이영천

사천왜성은 그날 이후 버려졌다. 긴 전쟁의 마지막 불길이 이곳 사천 앞바다에서 시발하였다. 진린을 설득해 노량으로 나간 이순신의 결단이 터뜨린 마지막 포성이었다. 그 포성이 마침내 긴 7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이는 오직 백성을 향한 충정이었다.

자라가 잠든 침오정


400여 미터 남짓의 사천읍성엔 임진왜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았다. 이곳은 또한 별주부전의 무대이기도 하다. 별주부전은 단순한 이야기다. 그 성곽 곁, 자라가 잠들었다는 자리에 정자 침오정이 오롯하다.

침오정 사천읍성 북벽에 잇닿아 4층짜리 누각, 침오정(枕鰲亭)이 서 있다. 별주부전의 자라가 잠들었다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침오정 사천읍성 북벽에 잇닿아 4층짜리 누각, 침오정(枕鰲亭)이 서 있다. 별주부전의 자라가 잠들었다는 곳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영천

병을 얻은 용왕이 약에 쓰려고, 토끼 간을 구해오라며 자라를 육지로 보낸다. 자라가 토끼를 꾀어 용궁에 데려오나 토끼는 이내 꾀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야기엔 해학이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권력의 상징인 용왕,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토끼, 느리지만 묵직한 자라의 지혜가 서로 어우러진다. 이야기에서 우리는 삶의 무게와 웃음의 여유를 동시에 맛본다.

용왕의 권위는 신성불가침이지만, 몸놀림이 재빠른 토끼가 위급을 벗어나며 이야기의 균형이 팽팽히 이어진다. 잠든 듯 느리게 움직이는 자라는 권력과 민중 사이의 매개로 '권력을 떼었다 붙이는 주체는 민중'이라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한다. 햇살 비친 성벽에, 잠에서 깨어난 자라가 토끼에게 속는 장면이 마치 졸음처럼 밀려든다. 민중과 권력의 인과관계가 어렴풋이 보일 듯하다.

사천읍성은 단순한 석성이 아니다. 전쟁과 평화, 권력과 민중, 느림과 빠름, 진중함과 해학이 공존하면서 숨 쉬는 공간이다. 자라가 잠잔 자리에서 무언의 소리를 듣는다.

"서두르지 마라. 느리지만 균형 잡힌 지혜는 반드시 찾아든다."

웃음 속에 삶의 통찰이, 해학 속에 민중의 지혜가 녹아 있음을 성곽이 조용히 일깨운다.

사천현(1872년_지방지도) 반달 모양의 사천읍성이 특이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직선의 남벽에 옹성을 가진 남문과 작은 문이, 그리고 동문과 서문이 보인다. 선진리로 추정되는 바닷가에 둥근 모양의 진(鎭)과 전선(戰船)이, 삼천포는 서금시(西錦市)로 표현되어 있다.
▲사천현(1872년_지방지도) 반달 모양의 사천읍성이 특이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직선의 남벽에 옹성을 가진 남문과 작은 문이, 그리고 동문과 서문이 보인다. 선진리로 추정되는 바닷가에 둥근 모양의 진(鎭)과 전선(戰船)이, 삼천포는 서금시(西錦市)로 표현되어 있다.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이 읍성을 거닐며 별주부전의 자라와 토끼, 용왕을 생각한다. 이야기에 담긴 해학에서 삶의 호흡이 느껴진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행에서, 환청 같은 울림이 들린다. 느림 속에 깃든 지혜를 기억하라. 웃음으로 되찾은 삶의 여백을 간직하라.

삼천포로 빠져야

흔히 대화가 본론에서 벗어나면 '삼천포로 빠진다'며 핀잔하곤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역사와 지리를 살펴보면 '삼천포'는 결코 희화화할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주∼사천∼삼천포'를 잇는 철도 '진삼선'이 일제강점기에 계획되어 1965년 완공된다. 중간 비행장도 주요 경유지였다. 남해안 중간에 자리한 항구 삼천포가, 내륙의 진주와 연결됨으로써 농·수산물을 효율적으로 운송·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여객 이동과 행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니 사실상 진삼선은 필연의 산물이었다. 즉, 삼천포로 빠지는 길은 '무계획적 탈선'이 아니라 교환과 필요, 생존이 만들어낸 합리적 선택이었던 셈이다.

재미있는 건 이 이야기가 현대 행정에서도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1995년, 삼천포와 사천이 통합될 때다. 두 도시의 주민과 공직자 사이에 갈등과 함께 '삼천포로 빠진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하였다. 통합 논의의 희화화이자 불만의 소재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저 말은 두 도시가 통합 후 서로 보완 관계로 재탄생하는 촉매로 작용하였다. 사천은 항공산업과 내륙 상권을, 삼천포는 항구와 해양 자원을 갖춘 전략적 결합의 도시로 변모하였다. 결국, 행정과 경제가 하나가 되는 '필연적 연결이자 통합'이었고, 이는 진삼선의 탄생처럼 당위였다.

현대인의 삶 속에도, 삼천포로 빠지는 순간이야말로 어쩌면 필연이자 생존의 변곡점인지도 모른다. 지독한 역설이다. 탈선처럼 보이는 과정조차 필요와 가치가 만들어낸 '의미 있는 여정'일 수 있다. 통합 때의 에피소드처럼, 삼천포로 빠지는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전략이자 선택이며 미래를 개척한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삼천포로 빠지려 할 때 웃음으로 넘기려 하지 말고, 왜 그 길을 선택해야 하는지, 얼마나 합리적인 선택인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삼천포로 빠졌다'는 게 우스운 농담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당위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도심 속 시간의 숨결, 사천읍성

사천만과 사천대교 사천 서포면에서 바라 본 사천만과 사천대교. 이 만에서 기나긴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가 촉발되었다.
▲사천만과 사천대교 사천 서포면에서 바라 본 사천만과 사천대교. 이 만에서 기나긴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전투가 촉발되었다. 이영천

사천읍성은 조선 초기인 1450년대, 둘레 1.2km 높이 4∼5m로 쌓은 석성이다. 단단한 이 성곽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3분의 2가 허물어져 사라져 버린다. 남은 성곽은 400여 미터 남짓이다. 도시와 도로 밑으로 사라진 성곽의 형체는 도시 공간을 더듬어 겨우 짐작할 뿐이다. 한때 백성의 삶을 품었던 성곽의 안팎을 상상 속에서만 그려볼 뿐이니, 안타까움이 발끝에 허무로 맴돈다.

사천만 바닷가 선진리 왜성이 효율을 추구한 직선의 군사 요새라면, 사천읍성은 방어와 행정, 백성의 삶이 뒤엉킨 복합 공간이다. 왜성과의 거리, 입지를 비교해 본다. 그 쓰임은 물론 서로 그렇게 쌓을 수밖에 없는 차이를 생각해 본다.

우리 읍성과 왜성을 구조적·학술적으로 대비·규명할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생김과 기능의 차이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뿐이다. 남아 있는 사천읍성을 거닐며 머릿속에 마치 설계도처럼 옛 성곽을 그려본다. 지킴과 생활, 전쟁과 삶이 한 장면 속에서 서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대립한다.

사천읍성 400여 미터 남짓 남아 있는 사천읍성의 북벽 중 일부.
▲사천읍성 400여 미터 남짓 남아 있는 사천읍성의 북벽 중 일부. 이영천

성벽 위를 걷자니, 돌 틈 사이 마른 풀이 바람 따라 흔들리고, 햇살 그득한 성벽이 나무 그림자 사이로 미묘하게 반짝인다. 손끝에 거친 질감의 성벽이 그대로 와닿는다. 발밑 자갈과 흙이 부스럭거리며 걸음에 박자를 맞춰준다. 침오정 창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니,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 무겁게 다가든다.

사라진 성곽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묻혀버린 800여 미터의 고된 노동이 아프게 다가든다. 비록 사라졌다고 하나, 도시 속으로 스며들어 시민 삶으로 남았으니 작은 위로일까? 도시가 끊어낸 성벽 밑으로 오래된 기억마저 묻힌 듯하지만, 남은 성벽이 역사의 발자취를 잇고 있어 위안을 얻는다. 결코 잊힌 게 아니다.

읍성 관덕정(觀德亭)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했다는 관덕정과, 남아 있는 사천읍성의 동벽 끝자락 모습이다.
▲읍성 관덕정(觀德亭) 활쏘기 등 무술을 연마했다는 관덕정과, 남아 있는 사천읍성의 동벽 끝자락 모습이다. 이영천

성벽 위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작금의 분주함과 소음에도 오래된 성벽이 묵묵히 시간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겠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햇살 품은 성벽, 이들이 전하는 질감 속에 지난 역사가 스며있다. 성곽 아래 침오정을 지난다. 남아 있는 성곽과 사라진 성곽, 그리고 왜성과 읍성의 공존이라는 불편한 역사적 현시가 마음에 깊고도 잔잔하게 다가든다.

사천읍성을 거닐다 보면, 바람과 햇살이 전하는 감각을 통해 역사의 무게와 허전함을 동시에 경험하게 된다. 돌과 흙, 바람과 햇살, 마른 풀의 흔들림이 겹치는 순간, 도심 한가운데서 과거와 현재도 무시로 겹쳐진다. 성곽은 고요히 시간을 품고, 오랜 숨결은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 삶을 말없이 다독인다.
#사천읍성 #사천왜성 #침오정 #삼천포 #진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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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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