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5.12.30 16:38수정 2025.12.3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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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끝자락인데도 올겨울에는 노고단에 눈이 쌓인 모습을 보기 어렵다. 두세 번의 한파가 있었다지만, 겨울답지 않게 포근하고 따사로운 날씨다. 겨울 들어 수량이 줄어든 서시천은 야윈 채 뱃살을 드러내놓고 졸졸거리며 어머니 품속 같은 강을 찾아 무심코 흐른다.
물이 머무는 보(洑)에서는 청둥오리 떼와 왜가리 두어 마리가 한가로이 겨울을 바디질하고 있다. 멧새와 오목눈이 무리도 천변 둔치의 갈대숲에서 무엇을 하는지 수선스럽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두려워서 우리는 몸부림치는 것일까?
상선약수(上善若水), 흐르는 물과 같이 살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삶은 없으련만,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치이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몸부림친다. 몸부림의 끝이 허망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날의 살이에 눈이 멀어 무명한 짓을 반복하는 것이다.

▲ 김장을 하기 위해 배추를 소금에 절입니다.
임경욱
3일간의 김장 작업
지난주에는 아내와 둘이서 김장을 했다. 9월 초에 텃밭에 심은 배추와 무는 농약을 하지 않고 거름도 주지 않았다. 풍성하거나 속이 꽉 차진 않았지만, 자연의 은총을 받고 튼실하게 자라줬다. 첫날은 50포기가 넘는 배추와 30개 가량의 살찐 무를 뽑아 소금물에 절였다. 다음날은 절여진 배추와 무를 건져 물에 씻은 후 물이 잘 빠지도록 바구니에 담아 뒀다.
3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는 집에서 준비해 온 양념으로 버무리는 일이다. 아이들이 동참하기로 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 오지 못했다. 연말이 가까워 입주민들은 모두 퇴소하고 텅 빈 센터에서 회의실 책상을 모아놓고 아침 일찍부터 시작한 작업은 오후 2시에야 마무리 되었다. 고난의 행군과도 같은 김장을 3일 동안 해냈다.
그전에는 보통 절임 배추를 주문해 적당히 끝냈는데, 올해는 손수 가꾼 무, 배추를 수확해서 미네랄이 풍부한 천일염에 절이고, 씻어서 물을 빼고, 양념을 버무리는 전 과정을 3일 동안 아내와 둘이 해냈다. 몸은 힘들고 고단하지만 참으로 값지고 의미 있는 김장인 것이다. 갓 담은 김치와 깍두기를 조금씩 포장해 우체국에서 도회지에 사는 두 아이에게 보냈다. 우리의 노고가 그네들 가족에게 건강한 밥상이 되어 줄 것이다.

▲ 소금에 절여 물을 뺀 배추에 양념을 버무립니다.
임경욱
12월에 접어들면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던 세대원들은 12월 말이 되자 센터가 텅 비었다. 모두들 또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난 것이다. 물론 센터의 운영 취지에 맞게 이 지역에 정착한 세대원도 39명 중 20명이나 되니 성공적인 셈이다. 살 집과 일자리만 주어진다면 농촌으로 이주해서 살려는 중·장년층이 많다. 이들은 살아봐서 안다. 시골살이가 얼마나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행복한 것인지를.
나도 이제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야 한다. 지난 3월부터 10개월을 머물렀던 곳이다. 이른 봄 설레는 마음으로 센터에 입주해서는 비닐하우스에 상추와 가지, 치커리 등 쌈채소를 정성 들여 심어 가꾸었다. 날씨가 따사로워지던 4월에는 노지 텃밭에 감자와 고추를 심어 지줏대를 세우고 애지중지 가꾸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꿈결 같은 1년살이
고추는 늦가을까지 우리 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줬으며, 감자는 가족들의 간식거리로 충분한 소임을 해줬다. 여름에 심은 옥수수와 고구마 또한 시골살이의 즐거움을 가져다준 고마운 작물이다. 그리고 가을에 심은 무, 배추까지 1년 동안의 농사가 국민학교 시절 시골 학교에서 반별로 화단을 가꾸는 일만큼이나 즐겁고 보람 있는 생활이었다.
가슴이 답답할 때면 차를 몰고 성삼재에 올라가 한달음에 노고단을 등반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계절별로 다양한 모양의 양탄자를 깔아주던 자연의 신비는 내가 매료하기에 충분했다. 골짜기마다 넘쳐나던 폭포수는 한여름 무더위를 식혀주던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 그 안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세상의 모든 시름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서시천에 왜가리가 무심히 앉아 있습니다.
임경욱
화엄사에서 연기암으로 오르는 산길은 마음을 닦아내는 길이었다면 천은사의 천은호수 둘레 산책길은 마음속에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길이었다. 그만큼 마음을 정갈하고 충만하게 해줬던 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깨우던 길은 서시천 뚝방길이다.
봄부터 겨울까지 벚꽃과 복사꽃에서 원추리로 이어졌다가 들국화, 쑥부쟁이, 갈대와 억새로, 사계절 내내 아름답거나 울울하거나 혹은 쓸쓸한 모습으로 내 몸피를 줄여주는 대신 마음의 살을 찌워주고 나를 이끌어 준 고마운 길이다. 또 보자고 약속했던 좋은 벗들, 다시 들르겠다며 손을 잡아준 고마운 사람들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행운유수(行雲流水), 떠도는 구름, 흐르는 물과 같이 집착이 없는 자유로운 삶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30여 년을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하고 이곳저곳 여행으로 1년, 필리핀에서 봉사자로 1년, 이곳 구례에서 1년을 구름에 달 가듯이 노매드로 살아가는 삶이 풍성하고 자유로웠다. 내년에 머물 곳도 물론 이런 한적한 시골일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어느 정도 체질화되어 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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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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