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타키나발루의 밤, 어둠보다 빛나는 기억을 새기다

[코타키나발루 여행] 봉가완 반딧불이 투어를 다녀와서

등록 2025.12.31 10:25수정 2025.12.3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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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신비의 세계
 코타키나발루 무아라 봉가안 마을은 반딧불 투어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코타키나발루 무아라 봉가안 마을은 반딧불 투어로 많은 여행자들이 찾는 곳이다. 전갑남

봉가완의 붉은 낙조가 수평선 너머로 몸을 숨기자, 세상은 이내 고요한 어둠에 잠겼다. 노을이 남긴 감동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 우리는 또 다른 신비의 세계를 향해 보트에 몸을 실었다. 코타키나발루의 밤을 밝히는 특별한 빛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보트 앞머리에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소년과 가이드가 앉아 있고, 노련한 선장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느긋하게 물길을 잡았다. 잔잔한 강물을 따라 어둠 속으로 깊숙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순간, 문득 궁금해졌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보았던 그 반딧불이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숨을 죽인 채, 맹그로브 숲의 짙은 실루엣을 예의 주시했다.

"마리마리!", 소년의 손끝에서 시작된 마법​

​적막을 깨고 소년이 손전등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반딧불이를 불러 모으는 신호였다. 가이드는 "이 불빛은 암컷의 신호예요. 수컷들이 사랑을 찾아 몰려오게 되는 거죠"라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아라 봉가안 해변에서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반딧불 투어에 나선다.
무아라 봉가안 해변에서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면 반딧불 투어에 나선다. 전갑남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정적이 흐르던 찰나,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작은 빛줄기가 번뜩이는가 싶더니, 이내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우리를 향해 날아든 것이다. ​가이드의 신호에 맞춰 우리는 현지어로 "모여라"라는 뜻의 "마리마리(Mari-mari)!"를 연신 외쳤다. 우리의 간절함이 닿았을까. 눈앞에 마법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뱃머리에서 소년이 손전등을 흔들며 반딧불이 불러 모은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뱃머리에서 소년이 손전등을 흔들며 반딧불이 불러 모은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갑남
 아주 작은 반딧불이 내 손에 앉았다.
아주 작은 반딧불이 내 손에 앉았다. 전갑남

그 어떤 수식어로도 담기 힘든 자연의 아름다움! 어느새 내 손바닥에도 사뿐히 왔다가 훨훨 날아간다. 계속 빛이 켜져 있는 게 아니라 깜박, 깜박, 깜박! 신비감을 자아낸다. ​수백, 아니 수천 마리의 반딧불이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가 지상으로 쏟아지듯 우리 주변을 에워쌌다. 소년의 손짓은 마치 빛의 군단을 지휘하는 마법사의 지팡이 같았다.


​우리를 매료시킨 그 눈부신 광휘는 사실 반딧불이의 치열하고도 짧은 구애의 몸짓이었다. 몸속의 루시페린(Luciferin)이 산소와 만나 만들어내는 이 빛은, 에너지의 90% 이상을 빛으로 전환하는 열기 없는 '차가운 빛'이다.

​성충이 되면 입이 퇴화하여 오직 이슬만 머금으며 번식에 전념하는 반딧불이는 2주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다. 그 찰나의 시간을 온몸으로 불사르는 생명력이 경이롭다 못해 엄숙하게 다가왔다. 예전에 보았던 고향의 그것보다 크기는 작고 앙증맞았지만, 청정 1급수와 맹그로브 숲의 습도가 빚어낸 이 장관은 그 어떤 보석보다 찬란했다.


숲에서 울려 퍼진 "메리 크리스마스"​

​누군가 먼저 "메리 크리스마스!"를 선창하자, 숲은 금세 크리스마스트리로 변모했다. 맹그로브 나무마다 빼곡히 내려앉은 빛의 조각들이 점멸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성탄절의 축복이었다. 때마침 일행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 정중식 '나는 반딧불' 가사가 귓가에 머문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ㅡ 정중식 <나는 반딧불>

​스스로 별인 줄 알았으나 실은 보잘것없는 벌레임을 깨달아도,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기에 괜찮다는 가사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가난한 선비가 반딧불이 빛으로 글을 읽었다는 '형설지공(螢雪지功)'의 고사를 떠올리며, 작은 생명체가 건네는 위로에 온 마음을 맡겼다.

가슴에 새긴 빛의 잔상​

​어둠은 깊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난 밤이었다. 코타키나발루의 습한 공기와 맹그로브 숲의 향기, 그리고 손바닥 위에서 잠시 머물다 간 차가운 불빛의 촉감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수많은 반딧불이 마법에 걸린 듯 모여들었다.
수많은 반딧불이 마법에 걸린 듯 모여들었다. 전갑남

현실로 돌아온 지금도 눈을 감으면 "마리마리!"를 외치던 우리의 목소리와 은하수처럼 흐르던 반딧불이의 군무가 아른거린다. 비록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별이었던 반딧불이처럼, 우리네 삶도 매 순간 뜨겁게 반짝이기를 소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in에도 실립니다. 지난 12월 11일부터 15일까지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코타키나발루 #무아라봉가안 #반딧불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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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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