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정안전부가 운영하는 고향기부제 플랫폼 고향사랑e음
행정안전부
지금 여러분 손에 지역을 살릴 10만 원이 주어져 있다. 단 오늘(31일) 밤 11시 30분까지 쓰지 않으면 이 돈은 사라진다. 여러분은 이 10만 원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2023년 고향사랑기부제가 시행되면서 올해로 벌써 세 번째 지역을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10만 원이 정말로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모두에게 주어졌다. 우리들 모두가 이 돈을 잘만 모아주면 병원이 없는 농산어촌에 소아과가 생길 수도 있고, 주인에게 버려졌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유기견도 살릴 수 있다. 지금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서, 또는 아주 오랫동안 꾸준하게 예산이 들어가야 해서 정부와 지자체가 꺼리던 사업들을 이 돈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이 돈을 모으는 데 힘을 보태는 건 경제활동인구 서른 명 가운데 한 명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머지 스물아홉 명은 이 돈을 제때 쓰지 않아 지역을 살릴 소중한 자원이 그대로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 해 12조 원 모으는 일본의 고향납세제
2025년 올 한 해 이렇게 모인 고향사랑기부금은 지난 15일 기준으로 1000억 원을 넘어섰다. 제도 시행 첫해인 2023년에 651억 원이 모였던 걸 생각하면 3년 사이 제법 많이 늘었다. 다시 말하지만 서른 명 가운데 한 명꼴로 모은 돈이 이 정도다. 그러니 만약 우리나라 경제활동인구 2970만 명이 모두 10만 원씩만 모으면 자그마치 3조 원에 달하는 돈이 지역을 살리는 데 값지게 쓰일 수 있게 된다.
알다시피 고향사랑기부제는 일본의 고향납세제를 본떠 만들었다. 주소지가 아닌 다른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하는 제도로, 기부금 10만 원까지는 이듬해 연말정산 때 전액 세액공제로 돌려받는다(1인당 연간 500만 원까지 가능). 여기에 기부액의 30%에 해당하는 답례품도 받을 수 있으니 10만 원을 기부하면 13만 원을 돌려받는 셈이다. 이렇게 모인 돈은 지자체가 지역 주민의 복리 증진과 지방소멸 대응 사업 등에 쓸 수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15년 앞서 2008년에 고향납세제를 시행했다. 갈수록 줄어드는 인구와 지방 세수로 이른바 '지역 소멸' 위기감이 일본 사회를 짓누르던 때였다. 일본 정부는 지자체 스스로 길을 찾도록 이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다고 한다. 한 번도 낮은 재정자립도나 적자를 걱정해 본 적 없는 지자체들에 처음으로 새로운 예산(기부금)을 마련할 권한을 주면서 서로 경쟁하고 또 살아남도록 했던 것.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난 일본에서 한 해 고향납세제로 모이는 기부금은 자그마치 우리 돈으로 12조 원에 달한다. 우리와 인구나 예산 규모가 다르다고 해도 우리보다 한참 앞서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일본에선 어떻게 고향납세제가 이렇듯 단단히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무엇보다 정부와 지자체가 민간의 역할을 인정하고 민간이 여러 영역에서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덕분이다. 민간이 운영하는 플랫폼과 시민 사회 조직들이 주도하는 '지정 기부 사업'들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처음 몇 년간 지지부진하던 일본의 고향납세제도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모금의 주체는 지방자치단체지만 우리처럼 이들 지자체가 모든 권한과 역할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사회(지역) 문제를 해결하려는 지역의 여러 시민 사회 조직들이 다양한 혁신 사업을 제안하고 이끌어갈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지자체들이 많다. 일본에서 처음 문을 연 민간 고향납세 플랫폼이자 지금도 90%가 넘는 지자체들과 협력하는 '후루사토초이스'가 처음 도입한 '거버먼트 크라우드 펀딩'(GCF, Government Crowdfunding)이 이러한 흐름에 불을 댕겼다.

▲ 일본에서 가장 인기 많은 민간 플랫폼 후루사토초이스의 GCF
후루사토초이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히로시마현 진세키고원초의 '유기견 살처분 제로' 프로젝트가 바로 이 GCF의 대표 사례다. 2012년 피스윈즈재팬이라는 비영리단체가 고향납세로 기부금을 모아 유기견을 보호하고, 나아가 재난 현장에서 활동하는 구조견으로 훈련시키겠다며 나섰고, 정말로 몇 년 만에 지역에서 더는 유기견이 살처분되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진세키고원초에서 유기견 보호와 훈련, 또 연계 산업의 고용 창출이 100명을 넘을 만큼 규모 있는 지역 사업으로 성장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도 해냈다. 일본 규슈에서 가장 작은 사가현은 2014년 난치병으로 알려진 '제1형 당뇨' 치료제 개발을 위한 재원을 이 GCF로 모으기 시작했다. 모금을 주도한 건 '일본IDDM네트워크'라는 민간단체였고, 지자체는 이곳을 지정 기부 단체로 지정해 모금과 사업 집행에 필요한 권한을 부여했다. 민간의 전문 조직과 행정 그리고 기부자를 잇는 '거버넌스'가 만들어지자 두 달 만에 우리 돈 1억 원이 넘게 모였다. 지자체는 이렇게 모인 기부금의 90%가 곧바로 일본IDDM네트워크에 전해지도록 조례를 만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사업에 모인 돈은 100억 원에 달하고, 사가현은 국립사가의대를 비롯한 20~30개 연구 기관과 함께 1형 당뇨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다. 이쯤 되면 고향납세제는 단순히 지역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는 통로를 넘어 시민 참여로 아래로부터 혁신적 정책(해법)을 만들어내는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기회라 할 만하다.
일본의 GCF와 지정 기부 사업들은 그동안 고향납세제가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답례품의 값어치 못 않게 공감과 효능감이라는 가치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걸 보여준다. 나의 작은 참여로 누군가에겐 절실한 사회(지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효능감.
24년 만에 소아과를 열게 해준 고향사랑기부제

▲ 고향사랑기부제 민간 플랫폼 위기브에서 진행중인 지정 기부 사업들
위기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우리나라에서도 지정 기부 사업이 늘고 있고, 민간의 역할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첫 지정 기부 사업은 민간 플랫폼 위기브(www.wegive.co.kr)가 강원도 양구의 사회적기업 '까미노 사이더리'와 함께 진행한 '못난이 농산물 多가치 프로젝트'다. 흠집이 난 '못난이 사과'를 모아 애플 콤부차와 발사믹 카라멜 등의 가공식품을 만들고 못난이 농산물과 연계한 공정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지구와 양구 모두를 살리는 프로젝트였다. 비록 아직 목표했던 5000만 원을 모으진 못했지만, 사업의 가치에 공감한 223명이 2800만 원을 모아줌으로써 지정 기부 사업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뒤로 여러 지역에서 민간단체가 제안하고 지자체가 힘을 보탠 다양한 지정 기부 사업이 펼쳐졌다. 광주 동구는 광주동구장애인복지관, 비영리단체 등과 함께 발달장애 청소년 야구단을 돕는 사업과 유기견의 살처분을 막고 입양을 돕는 사업 등을 벌이고 있는데, 지금까지 각각 9억 원과 8억 원이 넘는 기부금이 모였다. 두 사업 모두 정부와 지자체가 섣불리 나서기 힘든 사업들로, 고향사랑기부제가 아니었다면 빛을 보기 어려웠다는 점에서 더 뜻깊다.
소아청소년 병원과 전문의가 없던 전남 영암군에는 24년 만에 소아과가 생겼다.
"차로 45분 정도 걸려요 … 에고 광주까진 1시간이고 이런 조건은 애 키우기 힘드네요ㅜ … 서울이랑 경기도 살다 왔는데, 속상한 밤이네요 … 아픈 애를 데리고 차로 1시간은 너무 가혹해요."
전남지역 맘카페에서 오고 간 대화가 알려지면서 영암군이 고향사랑기부제의 지정 기부 사업을 떠올렸던 것. 알다시피 소아청소년과(병원)를 운영하려면 꾸준히 큰돈이 들어가야 해서 정부와 지자체 모두 운영을 망설일 수밖에 없다. 영암군은 고향사랑기부제로 의료 인력 인건비 2억 7000만 원을 모아 지난해 8월부터 영암군보건소와 삼호보건지소에서 격일제로 '고향사랑영암 소아청소년과' 진료를 운영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모인 기부금은 모두 3억 4000만 원이다.
정부도 이제 민간 역량이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걸로 보인다. 지난 17일 진행된 행정안전부의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에 민간 플랫폼의 운영 자율성을 확대해 기부를 활성화하는 등 '민간의 역량과 자원'을 적극 활용해 고향사랑기부제의 성장 엔진으로 삼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지금 여러분의 손에 지역을 살릴 10만 원이 주어져 있다. 오늘 밤까지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마는 돈이다. 떠나온 고향이 있다면 그곳에 기부할 수 있고, 답례품으로 쇠고기 10g 더 주는 곳을 찾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왕이면 그 10만 원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이들과 지역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분명 쇠고기 10g보다 더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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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북카페 기찻길옆골목책방'과 '문화살롱 이리삼남극장' 운영자. 최근 여행사 '한레일트래블'도 창업했다. 서울/수도권에서만 살다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 <로컬꽃이 피었습니다>,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 <나는 시민기자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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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1일 자정 사라질 10만 원으로 지역을 살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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