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그 틀림 앞에서 빨간 줄을 긋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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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답을 요구한다. 학교에서는 틀린 답에 X표를 그었고, 직장에서는 오류 없는 보고서를 원했다. 맞춤법 검사기는 빨간 줄로 틀린 부분을 표시한다. 한번이라도 더 정확하게, 한번이라도 더 올바르게 쓰는 것이 능력처럼 평가받는다.
S님의 마지막 문장은 그 흐름을 단숨에 거스른다. 그분의 틀림은 결이 매우 다르다. 달라서 당황스럽고, 달라서 부끄러웠다.
S님이 '틀려도 이게 제 글 같다'고 하신 건 배움을 거부하려는 게 아니었다. 고집을 부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날것의 정체성이었다. 맞춤법이 틀려도, 띄어쓰기가 이상해도, 그것이 70년 넘게 살아온 당신의 언어였던 거다. 다른 연령대 수업에서는 볼 수 없는, 시니어 글쓰기에서만 만나는 귀한 고집이었다.
나는 타자를 멈추고 S님께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틀린 거 고치려고 그러지 마세요. 그냥 쓰고 싶은 대로 쓰세요. 우리 반에서는 틀려도 괜찮으니까요. 제가 너무 강요해서 죄송해요."
전화기 너머로 S님이 잠깐 말이 없으시다가 조용히 웃으셨다.
"그래도 선생님이 매번 고쳐주시는데 안 고치면 실례잖아요."
"아니에요. 제가 실례했어요. 멀쩡한 글을 자꾸 고치려고만 해서요."
언어는 규칙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안에는 말하는 사람의 습관이 있고, 억양이 있고, 평생 쌓인 시간이 있다. 맞춤법은 바로잡을 수 있어도 그 시간까지 고칠 수는 없다. 아니, 고쳐서는 안 된다.
시니어 글쓰기 수업 역시 일종의 번역이다. 어르신들의 말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서, 나는 자꾸 '올바른 한국어'로 번역하려 했다. 하지만 S님의 한국어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였다. 70년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의 언어를 6개월 배운 규칙으로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오만이었다.
끝나지 않는 교정의 피로로 관계가 어색해질 뻔한 S님에게 이 강의실이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틀림을 허락하는 공기 때문일 것이다. 그 허락은 어르신 뿐 아니라 내게도 선물 같다. '틀린 사람'이 이런 존엄을 가질 수도 있다는 걸 다른 데서 절대 알 수 없었을 거다.
막연히 글쓰기를 잘 가르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S님 덕에 그 바람이 더 구체적으로 정리됐다. 나는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당신만의 방식으로 '틀린' 사람으로 남으면 좋겠다. 다음주에도 '되요'라고 쓰시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그 틀림 앞에서 빨간 줄을 긋지 않을 것이다.
그저 읽을 것이다. 당신의 70년이 만든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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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요'와 '웬지'... 이 학생의 글을 더 이상 고치지 않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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