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아의 삶은 왜 '자살 예방'으로는 구할 수 없는가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⑤] 자해, 자살 예방 정책 담론, 낙인을 연구하는 사회학자 에이미 챈들러

등록 2026.01.05 11:51수정 2026.01.0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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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AW2026 특집]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
섭식장애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나 미적 기준의 영향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감정, 신체, 관계, 사회 구조, 의료 체계, 기술 환경이 서로 깊게 얽힌 정치적·물질적·제도적 현상입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논의는 오랫동안 개인 책임, 가족 문제, 혹은 의학적 진단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섭식장애와 돌봄의 정치>는 이러한 협소한 틀을 넘어, 세계 각지의 연구자·활동가·정책 전문가·당사자 연구자들이 경험과 지식으로 구축해온 더 넓은 정치적 지평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현장에서 일하지만 섭식장애를 이해하고 돌봄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법, 젠더, 노동, 디지털 기술, 불평등, 거버넌스, 당사자 경험을 함께 다루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이 시리즈는 그들의 목소리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해 전하며, 한국의 독자 - 특히 당사자, 활동가, 정책 입안자, 연구자 - 가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다른 길을 상상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 기획·글: 박지니 (작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활동가)

영화 <천상의 릴리아(Lilya 4-ever)>(2002)는 소련 붕괴 직후 황폐해진 동유럽에 홀로 남겨진 십대 소녀 릴리아의 삶을 따라간다. 유일한 가족이던 어머니가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으로 떠난 뒤, 릴리아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식은 성매매뿐이다.

그녀에게 호의를 보이던 한 남성의 말에 기대어, 스웨덴에서 평범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국경을 넘지만, 도착과 동시에 릴리아는 감금된 채 성매매 수단으로 이용되며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다. 우연히 탈출에 성공하지만, 끝내 릴리아는 육교 위에서 몸을 던진다. 이 영화는 단굴레 라살라이테(1983–2000)의 실제 사망 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영화 <천상의 릴리아> 속 한 장면. 주인공 릴리아의 자살은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극단적 선택'이라 할 수 없다. 가난, 방임, 폭력, 착취가 일상으로 조직된 환경 속에서 릴리아의 삶은 서서히 '살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사건화된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위기로 밀려나기까지의 과정이다. 자살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얼굴이 통과해 온 조건과 맥락을 묻는 일에서 시작된다.
▲영화 <천상의 릴리아> 속 한 장면. 주인공 릴리아의 자살은 마지막 순간에 이루어진 '극단적 선택'이라 할 수 없다. 가난, 방임, 폭력, 착취가 일상으로 조직된 환경 속에서 릴리아의 삶은 서서히 '살 수 없는 것'이 되어 간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사건화된 위기의 순간이 아니라, 위기로 밀려나기까지의 과정이다. 자살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 얼굴이 통과해 온 조건과 맥락을 묻는 일에서 시작된다. Memfis Film

한국의 자살예방 정책 담론이 흔히 그리는 그림은 다르다. 필요한 것은 마지막 순간에 "극단적 선택"으로부터 마음을 돌려놓는 일, 치료받지 못한 우울증을 치료하는 일, 또는 "요즘 어떻게 지내?", "밥은 먹었어?" 같은 질문을 건네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천상의 릴리아>가 보여주는 것은 '마지막 순간'에 벌어지는 사건으로서의 자살이 아니다. 가난, 방임, 폭력과 착취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조건 속에서 삶이 서서히 '살 수 없는 것'으로 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 글은 자해, 낙인, 자살예방 담론을 연구해 온 영국 에딘버러대학교 사회학자 에이미 챈들러(Amy Chandler)와의 서면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약 2만 자 원고의 축약본이다. 생략 없이 쓴 전체 글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서 읽을 수 있다.

필자는 지난해 10월 말, 우연히 그의 책 <자해·의학·사회: '진정성'의 몸들>(2016)을 발견한 뒤 그에게 연락했고, 2026년 2월 한국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 강연을 요청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고, 나는 그의 연구가 섭식장애를 포함한 '돌봄의 정치' 논의를 여는 데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분노


무엇이 그를 이 무거운 주제로 이끌었느냐는 질문에, 챈들러는 '분노(rage)'를 말했다. 분노란 "상황이 지금과 같을 필요는 없고, 원래 달랐어야 한다"는 감각과 연결된 감정이며, 이미 복잡하다는 것을 '아는' 문제들에 대해 사회가 너무 쉽게 내놓는 단순한 답을 밀쳐내고 싶게 만드는 정직한 추동이다. 사회학은 원래 단순함을 거부하는 학문이며, 사람들이 축소하고 무시해 온 고통의 무게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에이미 챈들러의 책 '자해·의학·사회' 표지. 책에서 챈들러는 자해를 개인의 병리나 일탈로 환원하는 기존의 의학적 설명을 비판하며, 자해가 의료 제도, 진단 언어, 사회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고 관리되어 온 방식을 분석한다.
▲에이미 챈들러의 책 '자해·의학·사회' 표지. 책에서 챈들러는 자해를 개인의 병리나 일탈로 환원하는 기존의 의학적 설명을 비판하며, 자해가 의료 제도, 진단 언어, 사회적 규범 속에서 이해되고 관리되어 온 방식을 분석한다. Palgrave Macmillan

챈들러가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자살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우리는 자살을 흔히 특정한 날, 특정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극단적 행위"로 이해하지만, 자살은 한순간의 사건이라기보다 공간과 시간, 감정과 제도가 축적되어 만들어낸 결과일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특정한 몸들 위에 떨어진다. 그렇다면 자살을 이해한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그 사람이 통과해 온 조건과 맥락을 묻는 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이 관점은 오늘날 자살예방 담론이 반복하는 단순한 도식인 '힘들면 말하라, 혼자 견디지 말고 도움을 청하라, 전문가에게 솔직히 털어놓으면 해결될 것이다'를 다시 보게 만든다. 챈들러가 비판하는 것은 말하기 자체가 아니라, 말하기에 과도하게 투자된 기대다.

고통이 말로 충분히 포착될 수 있다는 가정, 말해진 고통은 정신질환의 언어로 해석 가능하다는 가정, 그 해석은 곧바로 보호와 치료로 이어진다는 가정. 이 도식에서 벗어나는 경험들, 말로 옮기기 어려운 고통, 진단의 언어로 정리되지 않는 절망은 쉽게 보호의 대상에서 밀려난다.

자살은 왜 ‘의료’로만 설명될 수 없는가. 에릭 레인하트(Eric Reinhart)는 인류학자이자 의사이며, 정신의학과 공중보건, 정치경제를 가로지르며 자살과 고통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임상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동시에, 자살을 개인의 병리나 치료 실패로만 설명하는 주류 담론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가 지적하듯,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정신과 진단과 치료가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자살률은 꾸준히 상승해 왔다. 이는 자살이 신경생물학이나 정신의학적 관리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빈곤·고립·차별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 그래프가 던지는 질문은 불편하다. 더 많은 진단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줄지 않았다면, 문제는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일 수 있다.
▲자살은 왜 ‘의료’로만 설명될 수 없는가. 에릭 레인하트(Eric Reinhart)는 인류학자이자 의사이며, 정신의학과 공중보건, 정치경제를 가로지르며 자살과 고통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임상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동시에, 자살을 개인의 병리나 치료 실패로만 설명하는 주류 담론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가 지적하듯,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정신과 진단과 치료가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자살률은 꾸준히 상승해 왔다. 이는 자살이 신경생물학이나 정신의학적 관리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빈곤·고립·차별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 그래프가 던지는 질문은 불편하다. 더 많은 진단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줄지 않았다면, 문제는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일 수 있다. Eric Reinhart

그는 자살예방이 개인의 위기 개입과 정신건강 서비스로 과도하게 수렴되는 경향을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의 개념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으로 설명한다. 희망을 품게 만드는 약속이 오히려 그 희망을 가진 사람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역설이다. "도움을 요청하라", "이야기하라",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반복될수록 말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은 침묵을 개인의 실패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은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고, 말하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버텨야 할 책임이 다시 개인에게 돌아온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삶은 그대로인 채 실패의 부담만 남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이 만들어진다.

이때 구조적 조건들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빈곤과 불평등, 차별, 불안정 노동, 사회적 배제처럼 삶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 '마음의 문제'라는 언어 뒤로 사라지는 순간, 자원을 재분배하고 조건을 바꿀 권한이 있는 정부와 권력자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은 채 '할 일을 했다'는 면책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를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며, 정신건강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자살률이 감소한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 역시 비판적으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건강 인프라'는 정신의학적 서비스 확충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거, 교육, 노동, 돌봄을 포함하는 '삶의 인프라'여야 한다.

정신건강 모델의 정서적 매력은 분명하다. 개인과 공동체에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며 개입 가능성과 해결의 감각을 빠르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각이 구조적 개혁을 대체할 때,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남는다.

그렇다면 '살 만한(liveable)' 삶의 조건을 만드는 자살예방은 무엇을 상상해야 할까. 챈들러는 답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영향을 받는 공동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일해야 한다. 하나의 모델이 모든 맥락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공동체는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정책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질문받지 못하고, 제대로 경청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을 자살예방 설계에 포함하려는 시도가 중요해진다. 핵심은 당사자들을 자신의 삶에 대한 '전문가'로 대하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천상의 릴리아>로 돌아가 보자. 릴리아의 죽음은 마지막 순간의 실패가 아니다. 살아내도록 강요받은 삶 속에서 탈출구를 잃어버린 결과다. 그래서 자살예방 정책은 결국 '릴리아를 만나야' 한다.

추상적인 위험군이 아니라 릴리아가 통과해 온 삶의 자리 — 그가 더는 다닐 수 없었던 학교, 방치된 주거와 돌봄, 폭력과 착취가 작동하는 경제 질서, 국가가 관리하고 개입했어야 할 조건들을. 자살을 치료의 문제로 재분류하는 대신, 어떤 삶들이 반복해서 탈락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 조건을 바꾸는 책임을 져야 한다. 주거, 교육, 노동, 돌봄, 폭력과 착취로부터의 보호. 이 모든 것이 자살예방의 영역이어야 한다.

자살예방은 더 많이 말하게 만드는 체계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그 조건을 묻는 순간, 자살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정치적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 이 글은 약 2만 자 분량의 원고를 축약한 버전입니다. 전체 글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원문에 포함된 주요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정신과 전문직 권위가 실패한 지점으로부터
○ '분노'
○ 20세기 자해와 자살 담론의 역사
○ '전형적인 자해자'의 탄생
○ NSSI: '자살 의도 없는 자해'라는 범주의 문제
○ 자해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기능적이다
○ 정신의학적 고해성사로서의 자살예방이라는 신화
○ 관리 가능한 '위기'에서 '삶의 조건'으로

▶ 전체 글 보기:
https://rabbitsubmarinecol.weebly.com/home/lt-5gt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섭식장애인식주간 #잠수함토끼콜렉티브 #자살예방 #자해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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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토끼콜렉티브는 섭식장애 경험 당사자로 구성된 비영리임의단체로 '섭식장애 인식주간(Eating Disorders Awareness Week)'을 기획하고 진행합니다. '잠수함토끼콜렉티브'라는 이름은 '(섭식장애) 환자는 결핍된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위기에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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