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은 왜 ‘의료’로만 설명될 수 없는가. 에릭 레인하트(Eric Reinhart)는 인류학자이자 의사이며, 정신의학과 공중보건, 정치경제를 가로지르며 자살과 고통을 연구해 온 학자다. 그는 임상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동시에, 자살을 개인의 병리나 치료 실패로만 설명하는 주류 담론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가 지적하듯, 미국에서는 2000년 이후 정신과 진단과 치료가 역사상 가장 크게 확대되었음에도 자살률은 꾸준히 상승해 왔다. 이는 자살이 신경생물학이나 정신의학적 관리로 환원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빈곤·고립·차별 같은 사회적 조건 속에서 형성되는 ‘사회적 행위’임을 보여준다. 이 그래프가 던지는 질문은 불편하다. 더 많은 진단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자살이 줄지 않았다면, 문제는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일 수 있다.
Eric Reinhart
그는 자살예방이 개인의 위기 개입과 정신건강 서비스로 과도하게 수렴되는 경향을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의 개념 '잔인한 낙관(cruel optimism)'으로 설명한다. 희망을 품게 만드는 약속이 오히려 그 희망을 가진 사람을 더 취약하게 만드는 역설이다. "도움을 요청하라", "이야기하라",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가 반복될수록 말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있는 사람들은 침묵을 개인의 실패로 경험하게 된다.
말하지 않으면 위험 신호를 보내지 않은 책임이 개인에게 돌아가고, 말하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는 버텨야 할 책임이 다시 개인에게 돌아온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삶은 그대로인 채 실패의 부담만 남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이 만들어진다.
이때 구조적 조건들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빈곤과 불평등, 차별, 불안정 노동, 사회적 배제처럼 삶을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들이 '마음의 문제'라는 언어 뒤로 사라지는 순간, 자원을 재분배하고 조건을 바꿀 권한이 있는 정부와 권력자들은 원인을 건드리지 않은 채 '할 일을 했다'는 면책을 얻는다.
이 지점에서 "자살률이 높은 이유를 사회구조적 문제로만 설명해서는 안 되며, 정신건강 인프라를 구축하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자살률이 감소한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 역시 비판적으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건강 인프라'는 정신의학적 서비스 확충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주거, 교육, 노동, 돌봄을 포함하는 '삶의 인프라'여야 한다.
정신건강 모델의 정서적 매력은 분명하다. 개인과 공동체에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며 개입 가능성과 해결의 감각을 빠르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감각이 구조적 개혁을 대체할 때, 문제는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대로 남는다.
그렇다면 '살 만한(liveable)' 삶의 조건을 만드는 자살예방은 무엇을 상상해야 할까. 챈들러는 답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영향을 받는 공동체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일해야 한다. 하나의 모델이 모든 맥락에 적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공동체는 이미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정책 설계 과정에서 충분히 질문받지 못하고, 제대로 경청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당사자 경험(lived experience)'을 자살예방 설계에 포함하려는 시도가 중요해진다. 핵심은 당사자들을 자신의 삶에 대한 '전문가'로 대하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천상의 릴리아>로 돌아가 보자. 릴리아의 죽음은 마지막 순간의 실패가 아니다. 살아내도록 강요받은 삶 속에서 탈출구를 잃어버린 결과다. 그래서 자살예방 정책은 결국 '릴리아를 만나야' 한다.
추상적인 위험군이 아니라 릴리아가 통과해 온 삶의 자리 — 그가 더는 다닐 수 없었던 학교, 방치된 주거와 돌봄, 폭력과 착취가 작동하는 경제 질서, 국가가 관리하고 개입했어야 할 조건들을. 자살을 치료의 문제로 재분류하는 대신, 어떤 삶들이 반복해서 탈락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 조건을 바꾸는 책임을 져야 한다. 주거, 교육, 노동, 돌봄, 폭력과 착취로부터의 보호. 이 모든 것이 자살예방의 영역이어야 한다.
자살예방은 더 많이 말하게 만드는 체계가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어야 한다. 그 조건을 묻는 순간, 자살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책임져야 할 정치적 질문으로 되돌아온다.
※ 이 글은 약 2만 자 분량의 원고를 축약한 버전입니다. 전체 글은 잠수함토끼콜렉티브 블로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원문에 포함된 주요 논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정신과 전문직 권위가 실패한 지점으로부터
○ '분노'
○ 20세기 자해와 자살 담론의 역사
○ '전형적인 자해자'의 탄생
○ NSSI: '자살 의도 없는 자해'라는 범주의 문제
○ 자해는 파괴적이지만 동시에 기능적이다
○ 정신의학적 고해성사로서의 자살예방이라는 신화
○ 관리 가능한 '위기'에서 '삶의 조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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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아의 삶은 왜 '자살 예방'으로는 구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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