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기를 배우고 싶은 일반인들을 모집해 오케스트라 악단 ‘하모니 악단’을 창단한 천석우 대표가 호른을 보여주고 있다.
<무한정보> 황동환
연습실 한쪽에 악기 케이스가 차례로 놓인다. 플루트와 클라리넷, 색소폰, 트럼펫, 호른, 트럼본, 튜바…. 초보자들이 조심스레 꺼내 든 관악기는 아직 손에 완전히 익지 않았다. 숨을 들이마셔도 소리가 제대로 나지 않거나, 음정이 흔들려 서로의 연주를 덮어버리기도 한다.
아직은 악기를 다루는 손길이 서툰 초보자들의 호흡은 거칠고, 때로는 음이 어긋나기도 하지만 지휘자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내는 순간, 흩어졌던 소리들은 하나의 방향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의 지원으로 지난해 창단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주민 조직인 '하모니악단'의 풍경이다.
음악교사에서 지휘자로
이 모든 변화를 이끄는 주인공은 33년 6개월 동안의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지역사회의 음악 전도사로 나선 천석우(64) 하모니악단 대표다. 그는 평생을 교단에서 학생들을 조율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는 예산 주민들의 삶에 조화로운 선율을 입히고 있다.
그의 지휘 아래 모인 이들은 전문 연주자가 아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들이다. 합주가 이어지는 동안 단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 그리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차하며 예산의 밤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천 대표의 음악적 뿌리는 고향인 청양군 장평면 은곡리에서 시작된다. 평범한 농촌 마을에서 자란 소년 천 대표가 음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부여고등학교 진학 뒤 관악부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였다.
금관악기인 '튜바'를 담당하며 저음의 묵직한 매력에 빠진 그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당시 "악기를 살 돈이 없었다"는 그는 "튜바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결국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며 악기 대신 자신의 몸이 악기가 되는 '성악'으로 전공을 바꿔 한국교원대학교 음악교육과에 진학했다.
군대에선 논산훈련소에서 군악병 선발 테스트를 거쳐 부산 군수사령부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이 기간을 "관악을 더 깊게 알게 된 시간"이라고 했다.
1990년 서천 시문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그는 보령 주산산업고·온양고·예산 고덕중·예산여중 교사, 아산 송남중·배방중 교감 등을 거쳤고, 2023년 8월 아산 인주중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는 학창 시절 꿨던 꿈을 다른 모습으로 실현시켰다. 학교 현장에서 그는 합창단을 꾸리고, 관악부를 창단하고, 운영했다. 시문중과 고덕중에서 관악부를 창단했고, 온양고에서는 관악부 운영을 맡았다.
퇴임 뒤 천 대표는 '창업'을 고민했다. 교육공무원 퇴직 연수원에서는 "창업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성공률이 일반인은 6%, 공무원은 3%라는 말도 따라왔다. 그럼에도 그는 한서대학교 중장년 창업센터에서 2년 동안 교육을 받으며 자신의 길을 다시 찾았다.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라"는 조언 끝에 그가 선택한 분야는 오케스트라였다.
하지만 문화예술 관련 사업비 확보는 쉽지 않았다. 도청과 군청 공모에 여러 번 도전했으나 "계속 떨어졌다"고 했다. 그러던 중 군청 문화관광과 직원의 안내로 예산군행복마을지원센터의 '농촌지역개발사업 지속관리체계 구축' 사업 공모를 알게 됐다. 그는 이 사업을 지난해 3~4월쯤 신청해 선정, 5월 말부터 준비를 거쳐 6월 첫 주부터 '하모니악단'이라는 이름으로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
센터는 신활력플러스 사업 완료 뒤 주민 조직이 소멸하지 않도록 전국 최초로 매년 1억5000만원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하모니악단은 올해 이 사업의 신규 팀으로 선정돼 탄생됐다. 여기에 더해 한서대학교 창업교육센터로부터 천 대표가 받은 500만원의 지원금은 악단 운영의 귀한 밑거름이 됐다. 그는 이 돈을 활용해 악기가 없는 주민들도 누구나 음악을 시작할 수 있도록 대여 체계를 구축했다. 처음에는 개인 악기가 거의 없어 대여 부담이 컸으나, 시간이 지나며 스스로 악기를 마련하는 단원이 늘어 조금 숨통이 트였다고 했다.
하모니악단의 시작은 '사람을 모으는 일'이었다. 천 대표는 <무한정보>에 단원 모집 공고를 내고, 포스터를 직접 제작해 읍내 주요 길목에 붙였다.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에도 모집 글을 올렸다. 모집의 핵심 문구는 '무료'였다. 무료 악기 대여, 무료 지도. 대신 조건은 하나, "열심히 배운 뒤 공연에 함께 서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처음 모였던 인원은 30~40명. 이후 들락날락하는 사람이 생기며 지금은 20명 안팎이 꾸준히 나온다. 출석부에는 더 많은 이름이 남아 있지만, 실제로 매주 호흡을 맞추는 인원은 그 정도라고 했다.
"우리 악단의 문턱은 낮다. 열심히 배우고 공연에 함께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누구든 환영한다"라며 "현재 단원의 절반 정도가 대여한 악기로 음악의 첫발을 떼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 현장에서 평생을 보낸 천 대표의 운영 철학은 세심하고도 철저하다. 그는 첫 수업 시간에 악보를 나눠주는 대신 '안전 교육'을 했다고 한다. 악기 수업에 "웬 안전교육?"이라며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그는 고가의 악기를 소중히 다루는 법부터 연주 시 주의사항까지 꼼꼼히 가르쳤다. 이는 악기를 떨어뜨려 망가뜨리는 일을 방지하고, 올바른 연주 자세를 통해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그만의 교수법이었다.
또 그는 매주 연습 시간보다 훨씬 일찍 연습실에 도착한다. 진도를 따라오기 어려워하는 단원들을 위해 '사전 개인 레슨'을 자처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던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단계별로 차근차근 따라오면 누구나 악기를 불 수 있게 된다"며 "제가 조금 더 수고하더라도 단원들이 재미를 느끼고 소리를 완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보다 큰 보람이 없다"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러한 헌신에 단원들은 감동으로 화답했다. 한 색소폰 주자는 그를 향해 "현대사회의 유능한 리더"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소리를 빚어내는 그의 리더십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서툰 호흡이 모여 화음이 되기까지

▲ 예산해봄센터 강당은 ‘하모니악단’의 악기 수업이 있는 날이면 조그만 오케스트라 공연장이 된다.
천석우
단원들의 사연은 제각각이다. 어떤 부모는 자녀에게 악기 레슨을 시키고 싶어 초등학생을 데리고 왔다. 젊은 층도 있었고, 악기를 조금 불어본 사람도 있었다.
경험자는 "스타일이 아니다"며 떠나기도 했고, "재미있다"며 남은 사람도 있었다. 천 대표는 "대부분 40~60대가 많다"고 말했다. 결국 '무료'보다 '재미'와 '성취'를 붙잡은 이들이 끝까지 남은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플루트를 배우러 온 60대 아내가 들려준 남편의 사연이 가슴 뭉클하다. 기타 연주에 능했던 남편이 손가락 부상으로 더 이상 악기를 다룰 수 없게 되자, 상심이 컸다는 이야기다. 천 대표는 손가락 힘이 상대적으로 적게 드는 트럼펫을 권유했고, 남편은 끈기 있는 노력 끝에 다시금 악기 연주자의 삶을 회복했다. 천 대표는 이를 "내 눈앞에서 일어난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또 수원에 연고가 있는 60대 현직 간호사는 예산에 거주하며 매주 연습에 빠지지 않고 참여한다. 합덕에서 온 한 단원은 트럼펫을 배우고 싶어도 마땅한 곳이 없어 방황하다가 하모니악단의 모집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다. 이들에게 하모니악단은 단순히 악기를 배우는 곳을 넘어, 일상의 활력과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소중한 공동체로 자리 잡았다.
밤이 깊어가는 예산해봄센터 연습실에서 천 대표의 지휘봉이 허공을 가르자 웅장한 관악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프로페셔널한 연주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는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맞추어가는 '조화'의 진심이 담겨 있다.
천 대표는 "음악은 사람의 닫힌 마음을 열고, 서로 다른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며 "우리 하모니악단의 선율이 예산 구석구석에 퍼져 주민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되기를 바란다"며 소박한 소망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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