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날마다 목발에 기대어 집을 나선다. 두 다리에 충분한 힘을 싣기 어려운 대신 어깨와 팔, 그리고 몸 전체의 균형으로 한 걸음씩 만들어 간다. 이동이란 힘의 총량이 아니라 힘을 어떻게 배분하고 균형을 잡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매일 확인한다. 비나 눈이 내리는 날이면 누구의 다리든 그렇듯, 몸은 자연스럽게 다시 계산해서 속도를 늦춘다. 이동은 언제나 물리적 조건과 환경 위에서 이루어지며, 결코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한편 내가 연구실에서 마주하는 세계는 눈부시게 빠르다. '0'과 '1'이 나노초 단위로 교차하고, 데이터는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 6G 네트워크의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서로 다른 두 속도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세상은 6G를 향해 질주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의 삶이 그 속도를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가속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의 하루는 여전히 이동 하나를 두고 계산과 기다림의 연속이다. 공학자로서 나는 기술의 진보를 사랑한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시민으로서, 나는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이 기술은 과연 누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고 있는가.
속도가 아니라 기준의 문제
우리는 인공지능과 자율주행이 가져올 편리한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화려한 서사 이면에서 이동과 접근의 문제는 여전히 개인의 사투로 남아 있다. 휠체어 이용자가 언제 올지 모르는 장애인 콜택시를 기다리는 시간,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지하철역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하는 순간은 기술이 부족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애초에 기준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반복되는 일상이다.
기술은 빠르게 진보하지만 삶은 그만큼 안정되지 않는다. 예측 가능했던 경로는 사라지고, 개인이 감당해야 할 위험은 오히려 커졌다. 이런 시대일수록 기술은 더 강한 사람을 돕기보다, 가장 취약한 조건에 놓인 사람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약자는 가장 먼저 탈락한다. 그래서 디지털권이라는 말은 기술의 미래가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생활 조건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도의 경쟁이 아니라 이 사회가 어떤 속도를 '정상'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다.
'약자를 먼저 떠올리자'는 말은 기술 발전을 멈추자는 주장도, 속도를 늦추자는 요구도 아니다. 가장 빠른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된 시스템은 효율적일 수 있지만, 언제나 누군가를 바깥에 남긴다. 반대로 가장 느린 사람의 조건을 기준으로 설계된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더 안전한 질서를 만든다. 이는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설계 기준의 문제다.
기능을 넘어 '예측 가능성과 연결성'으로
다정한 기술이란 화려한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측 가능성과 연결성을 제공하는 기술이다.이동 인프라에서 인공지능의 역할은 이동을 대신 계산해 주는 데 있지 않다.
쓸 수 있는 길과 쓸 수 없는 길을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것, 엘리베이터 고장이나 공사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어 누구도 길 위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것이 디지털권으로서의 기술이다. 자율주행 역시 고급 승용차의 편의 기능이 아니라, 이동이 어려운 사람에게 이동 그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공공 교통 수단으로 먼저 설계될 때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의료와 돌봄 영역도 마찬가지다. 시골에 홀로 사는 노인이나 만성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돌봄은 편의가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다. 필요한 것은 상황을 대신 판단하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도움 요청이 즉시 공공의 의료·돌봄 체계로 연결되는 구조다. 기술이 사람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놓치지 않도록 돕는 역할 말이다.
저항과 흐름
전기전자공학에서 회로를 설계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개념은 '저항'과 '흐름'이다. 흐름이 막히면 열이 발생하고, 결국 시스템은 타버린다. 사회도 다르지 않다.
기술의 혜택이 특정 계층에만 고이고, 장애인이나 고령자, 돌봄이 필요한 시민에게 기술이 '저항'으로 작용하는 순간 그 사회는 지속 가능할 수 없다. 기술은 이미 충분히 빠르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 속도를 누구의 삶에 맞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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