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01.29(월)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 참여연대와 1,080명의 ‘천인공노 시민 고발인단’이 법관 사찰 책임자 4인(임종헌, 양승태 등) 직권남용죄로 고발장을 제출하는 현장 사진
참여연대
'농단(壟斷)'이라는 단어가 매일매일 뉴스를 타던 때가 있었습니다. 국정농단에 이어 사법농단이 터져나왔던 2017년이 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이 쓰이지 않던 '농단(壟斷)'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익숙해졌던 것도 그때부터였습니다.
'농단(壟斷)'은 높은 자리에서 얻은 힘으로 사사로이 이익을 독차지한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높은 곳의 힘을 이용하여 사사로이 대상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어떤 뜻이든 간에 정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사법부가 '농단'이라는 오명을 그 이름에 덧붙이는 바람에 '사법농단'이 고유명사가 된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몹시 부끄러운 일 중에 하나임은 분명합니다.
권한이 없어서 죄가 안 된다는 역설
사법농단 행위자에 대한 판결의 내용은 더욱 부끄럽습니다.
만약에 장관이나 국정원장쯤 되는 사람이 법원장에게 전화해서 '특정 재판은 언제 진행되느냐', '이제 진행할 수 있는거 아니냐'고 여러 번 연락을 하거나 '내가 아는 아무개씨는 좀 억울한 것 같은데 기록을 제대로 봤느냐?'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대통령이 특정한 재판을 맡고 있는 판사에게 전화를 걸어 판결 이유나 선고할 때 할 말이 뭔지 미리 보고하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면 어떨까요?
그런 연락을 받은 판사가 분개하여 양심선언을 하더라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면 섬뜩해집니다. 이 판결은 바로 이러한 행위를 하는 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사법행정권자는 개별 재판부의 재판 절차나 판결 내용에 개입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독립된 재판에 대해서 누구도 지휘·감독권한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개입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판결을 한 재판부가 누구를 봐주기 한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법리는 임종헌에 대한 판결을 한 해당 재판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대법원 판례 법리(2022. 04. 28. 선고 2021도11012 판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에 의한 것입니다.
"재판관여행위가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이라고 볼 수 있는 법령상 근거가 인정되지 않는 이상, 사법행정권자의 일반적 직무권한의 범위를 넘는 월권행위가 그 지위를 이용한 불법행위로 될 수는 있어도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대법원 판례 법리는, 재판 독립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누구도 개별 재판부의 재판 절차나 판결 내용에 개입할 권한이 없다는 지엄한 선언입니다. 재판 독립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하더니 바로 같은 이유로 재판 개입에 면죄부를 주는 알쏭달쏭한 해석입니다.
그들만의 카르텔
이 부분과 관련하여 법원만 탓할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잘못된 행위를 처벌할 죄명이 마땅치 않다는 점은 국회에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형법을 개정하여 재판개입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있었습니다. '지위남용죄'를 신설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원포인트로 '재판개입죄'를 신설하자고 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가시화된 개정 논의는 보이지 않습니다. 혹시 그러한 개정이 국회의원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실제 임종헌은 법원행정처에서 일하는 판사들에게 국회의원의 개인적인 사건을 검토하는 보고서를 쓰라고 시켰고, 사건이 진행 중인 재판부의 재판장에게 전화를 걸기도 하였습니다. 대상 국회의원은 여당 소속도 있고, 야당 소속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국회의원들에게 사법농단이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런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만들지 않고 미루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법원행정처는 청와대의 지시를 받아 법률검토를 한 결과물을 보고하기도 했습니다. 청와대에도 법률전문가들은 있었을 것입니다. 내부 전문가가 부족하면 로펌에 맡겼어야 할 일들을 청와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법원행정처에 맡겼고 판사들은 청와대를 위해 보고서를 쓰는 자문기관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당연히 정부가 한쪽 당사자인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정부는 자신이 당사자가 되는 사건에 대해 미리 판사들의 검토보고서를 받아 본 셈입니다. 전교조 사건에서는 정부 측이 이렇게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넣은 재항고이유서, 보충서면을 작성해서 재판부에 제출하기도 했습니다. 판사가 한쪽 대리인 역할을 한 셈입니다.
다시 사법개혁을

▲ 2025.11.20.(목) 오후 1시 30분, ‘끝나지 않은 사법농단, 사법개혁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토론회 현장 사진
참여연대
이 판결문은 법원행정처 사람들뿐 아니라 정부 관계자, 국회의원들이 재판 독립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지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사법농단이 세상에 드러난 직후 엄청난 공분이 일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의 엄중함이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 판결문에는 법원장에게 특정 재판에 대해 검토한 보고서를 건네받고 내용을 전달한 전 법원장이 등장합니다. 그 전직 법원장은 헌법재판관이 되었습니다. 법원행정처에서 재판 내용을 받아서 재판을 하고 있는 판사에게 전달하더라도, 그 사실이 모두 밝혀진 후에도 헌법재판관이 될 수 있는 사회라는 것이지요. 사법농단은 과연 어떤 교훈을 남긴 것일까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1심, 2심 판결문의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불법적이고 부적절한 행위들이 한두 명의 일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송곳처럼 튀어나온 한 명(이탄희 전 판사)이 나오기 전까지 다수의 판사들은 왜 이렇게 잠잠했을까요. 사법행정에 무언가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사법농단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된 사법행정구조과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력구조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법농단이 뇌리에서 잊혀져 가면서 사법행정구조개혁의 희망도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2024년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여러 재판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발생하더니 다시 사법행정구조개혁(법원행정처 폐지, 사법행정위원회 설치)의 불씨가 살아났습니다. 이 불씨가 다시 꺼지지 않고 사법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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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는 정부, 특정 정치세력, 기업에 정치적 재정적으로 종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활동합니다. 2004년부터 유엔경제사회이사회(ECOSOC) 특별협의지위를 부여받아 유엔의 공식적인 시민사회 파트너로 활동하는 비영리민간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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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판결이 남긴 숙제: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돌려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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