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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4년차인데요, 지갑 터는 주범을 알려드립니다

퇴직한 지 한 달 반 된 후배와의 만남... 시간 공백이 불안을 만들고 불안이 소비 부추겨

등록 2026.01.21 18:58수정 2026.01.2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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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형님, 오늘 뭐 해? 바빠?"

지난 금요일,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회사에 있을 때는 그냥 안부였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니 그 말이 질문처럼 들린다. '요즘 어때?'가 아니라, '요즘은 어떻게 버티고 있어?'라는 뜻이 함께 섞여서다.


"오늘… 오늘은 강의가 없어서 카페에 왔는데."

후배가 웃었다.

"또 카페야. 거기서 죽돌이 하면 직원들이 눈치 안 줘?"
"죽돌이… 하하. 그렇긴 하네."

나는 늦어도 오후 3시쯤 카페를 나온다. 하루 종일 있을 수는 없다. 카페에 있으면 3시까지는 시간이 알아서 굴러간다. 커피 한 잔, 글 한 편, 사람들 오가는 소리… 그것만으로도 하루가 정리된다. 그런데 3시가 넘어 집으로 돌아오는 순간부터는 다르다. 시간을 잡아주는 게 사라진다. 마치 회사 다닐 때 퇴근 후 시간이 갑자기 비어 버린 것처럼, 하루 뒤쪽이 힘없이 늘어진다.

후배가 말을 이었다.


"형님 그러지 말고, 오랜만에 남한산성 올라가자. 할 이야기도 있고. 대신 막걸리에 파전은 내가 쏜다."

퇴직한 지 한 달 반 된 후배의 고민


 후배와의 산행은 운동이라기보다 서로의 하루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후배와의 산행은 운동이라기보다 서로의 하루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why_k on Unsplash

그 한 마디에 나는 노트북을 덮고, 카페에 앉은 지 30분 만에 밖으로 나왔다. 후배는 퇴직한 지 한 달 반쯤 됐다. 아직 '퇴직 직후'의 시간을 살고 있는 셈이다. 반면 나는 퇴직 4년 차다. 경험이 쌓였다는 건, 그 빈 시간을 먼저 지나봤다는 뜻이다. 그래서 후배와의 산행은 운동이라기보다 서로의 하루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남한산성 성곽을 돌며 후배가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형님, 퇴직하니까요… 씀씀이가 커졌어요."

시간이 많아지니 가고 싶은 곳도 늘었고, 한 번 밖에 나가면 커피값, 점심값, 주차비, 택시비가 줄줄이 따라붙었다. 집에만 있기는 싫어서 아내와 여행도 두 번이나 다녀왔다. 그러다 통장을 보면 버는 돈은 없는데, 쓴 돈만 더 선명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후배 이야기다.

"집 떠나면 돈이란 말 있잖아요. 제가 지금 딱 그 꼴이에요."

그 말이 새삼 와 닿았다. '시간부자'라는 말의 허상이 딱 거기에 있었다. 시간이 많아졌는데 그 시간이 자산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돈 나갈 구멍만 늘어난다.

회사 다닐 때는 시간이 없어서 못 했던 것들을 이제는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할 수 있음'이 곧바로 '돈이 나감'으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카페 한 번 나가면 커피 값은 기본이다. 점심을 먹으면 만 원은 금세 넘는다. 주차비도 3천~5천 원씩 나가고, 어쩌다 택시라도 타는 날엔 만 원이 더 붙는다. 하루는 그렇게 그냥 지나가는데, 비용은 2만~3만 원이 훌쩍 빠져나간다. 매일은 아니어도 한 달로 치면 '밖에 나간 날'만큼 통장이 얇아진다.

특히 퇴직 직후에는 더 그렇다. 새로운 자유가 반갑기도 하고, 어색한 공백을 집에만 앉아 버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선택이 늘고, 그 선택이 그대로 지출로 이어진다. 후배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형님… 나 요즘 조금 불안해요. 원래 이렇게 쓰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돈이 계속 나가요. 이제 한 달 조금 지났는데 벌써부터 이러면 좀… 그래서 오늘은 형님한테 조언을 좀 구하고 싶어서요."

퇴직 이후의 소비는 꼭 '사치'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대개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서 시작된다. 시간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같은 외출도 완전히 달라진다. 필요해서 쓰는 돈이 있고, 빈 시간을 피하려고 쓰는 돈이 있다. 겉으로는 "바람 좀 쐬고 힐링했지"처럼 보이지만, 속은 다르다. 후배의 말은 결국 이런 뜻에 가까웠다.

"퇴직 후 시간은 많아졌는데,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마음이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이 밖으로 나가게 만든다. 밖으로 나가면 결국 많든 적든 돈을 쓴다. 그러다 통장을 보면 다시 불안해진다. 결국 공백이 불안을 만들고, 불안이 지출을 만들고, 지출이 다시 불안을 키우는 흐름이다. 퇴직 후 첫 달에 이런 느낌이 든다면, 그건 '절약이 부족한 문제'라기보다 아직 하루가 안 잡혀서 생기는 흔들림인 경우가 많다.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그랬다.

나가지 않으면 불안할 때

 돈을 붙잡기 전에, 먼저 하루를 붙잡아야 한다.
돈을 붙잡기 전에, 먼저 하루를 붙잡아야 한다. 오마이뉴스

나는 후배에게 거창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정답이 아니라, 먼저 겪으며 알게 된 감각 몇 가지였다. 돈을 붙잡기 전에, 먼저 하루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 말이다. 바깥이 늘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나가면 돈이 든다"가 아니라, "나가지 않으면 불안하다"가 되어버릴 때다. 그때부터 소비는 선택이 아니라 마음을 달래는 습관처럼 움직인다.

남한산성에서 우리가 한 건 단순했다. 걷고, 얘기하고, 하산 직전 남한산성 막걸리 두 병과 파전 한 접시가 전부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 이상하게 '쌓이는 시간'으로 남았다. 돈이 얼마 들었느냐보다, 그날 하루의 중심이 어디였느냐가 달랐기 때문이다.

목적 있는 하루가 늘어나면 지출은 자연히 '관리되는 지출'로 바뀐다. 가고 싶은 곳을 가더라도, 그게 공백을 막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삶의 가치를 쌓는 선택으로 바뀐다. 산행을 마치며 후배가 내게 한 말이 있다.

"형님, 오늘은 돈 쓴 게 아깝지가 않네. 이상하게, 하루가 헛돌지 않았다는 느낌이 드는 걸."

나도 웃었다.

"그렇다면 나도 땡큐다."

헤어져 돌아오는 길, 생각이 정리됐다. 퇴직자의 시간과 돈은 늘 같이 움직인다. 하지만 핵심은 '절약'이 아니라 '방향'이다. 퇴직하면 시간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문제는 그 시간을 무엇으로 붙잡느냐다. 작은 목적 하나만 있어도 시간은 자산이 된다.

퇴직 이후의 불안은 통장에서 시작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상의 공백에서 시작된다.
덧붙이는 글 이글은 medium.com 에 ‘자유 시간’의 높은 대가: 한국 은퇴자의 하루가 흔들리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글의 일부가 영문으로 업로드되었습니다
#시간관리 #소비습관 #노후불안 #생활리듬 #퇴직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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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 이후 40년을 ‘어떻게 버틸까’가 아니라 ‘어떻게 다시 살아볼까’라고 묻는 사람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듣고, 설명하고, 함께 고민해 온 이야기를 강의와 글로 천천히 풀어냅니다. 거창한 비법보다, 같이 버틸 수 있는 ‘노후해법’을 독자들과 함께 찾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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