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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1.15 14:25수정 2026.01.15 15:15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은 것들의 신>표지 곳곳에 좋은 문장이 가득했던,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
문학동네
해가 바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계획을 짠다. 나 또한 매년 올해는 다르리라, 하는 식상한 결심을 한다. 작심삼일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나의 경우, 작심삼일보다 조금 나은 작심보름이다(과연 나은 것일까). 보통 보름 정도 계획이 유지되다가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작년 가을, 이사할 때 정리하다 보니 보름 정도 쓴 영어 단어장, 영어 문법 및 문장 노트가 3권이나 나왔다.
계획을 꾸준히 지키고 싶어 다양한 인증 카톡방을 활용하고 있다. 그중 2주에 한 번 완성된 글을 쓰고 합평을 하는 '다정한 서술자'라는 모임이 있다. 대부분의 활동은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데, 글을 제출하지 않으면 오프라인 모임 때 벌금 명목으로 커피를 산다. 최근 멤버 중 한 명이 정성스런 피드백이 고맙다며 모임 때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고마우면서도 내가 모임의 총무라 고민이 됐다. 그럼 벌금 커피는 어쩌지? 벌금 디저트로 해야 하나? 그냥 넘어갈까? 그러던 차에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작은 것들의 신>을 읽게 되었다.
<작은 것들의 신>을 보면 벌을 받고 싶어하는 라헬이라는 여자아이가 나온다. 라헬은 엄마에게 실수로 상처 주는 말을 한다. 엄마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사람들이 널 조금 덜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라헬은 엄마가 자신을 덜 사랑하는 대신 차라리 벌을 받고 싶다. "내 벌은 어쩌고요? 아직 벌을 안 줬잖아요!"라고 말하는 라헬에게 옆에 있던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어떤 것들은 그 자체에 벌이 딸려있지."
어떤 것들은 그 자체에 벌이 딸려있다. 붙박이 옷장이 달린 침실처럼. 곧 그들 모두 그 벌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벌이 각기 다른 크기로 온다는 것을. 어떤 벌은 침실의 붙박이 옷장처럼 너무 크다는 것을. 평생을 그 안에서, 어두운 선반 사이를 헤맬 수도 있다는 것을. (위의 책, p163)
내가 글을 제출하지 못했을 때, 많은 핑계가 있었다. 마감인 일이 있었고,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미리 서둘러 준비했다면 완성된 글을 제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피드백을 받을 기회, 피드백을 토대로 글을 더 촘촘하게 만들 기회, 완성된 글을 갖게 될 기회를 모두 놓쳤다. 그러니 글을 쓰지 못한 것은 그 자체로 벌이다. 벌금 따위는 필요 없다.

▲'다정한 서술자' 오프라인 모임 최근에 있었던 '다정한 서술자' 오프라인 모습. 모여서 각자 글을 쓰고,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박영
'다정한 서술자' 오프라인 모임에 가서 말했다. 나도 벌금을 내야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 말하는 게 조금 웃기긴 했지만.
"글을 쓰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벌이니, 벌금은 걷지 않겠습니다."
생각했을 때와 달리 입 밖으로 내뱉으니 그 말이 너무 냉정하게 들려 놀랐다. 분위기가 순간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서둘러 몇 마디를 덧붙였다.
"자신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받는 건 감사한 거잖아요. 그런 기회를 놓치셨으니 이미 벌을 받은 거예요."
몇 마디를 덧붙여도 따듯한 내용으로 바뀌지 않았다. 어떤 사실은 그냥 냉정하다. 내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웅성거렸고, 어떤 멤버는 "나 그냥 벌금 내면 안 돼?"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 말이 벌금보다 무섭다면서도 일리가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25년이 가고, 26년이 왔다. 난 연말과 새해를 이 문장과 함께 지냈다. '어떤 것들은 그 자체에 벌이 딸려있다.'
운동, 외국어, 감사일기를 인증하는 카톡방도 있다. 하지 않을 때 벌금을 낸다. 그러나 벌금과 상관없이 이것들을 하지 않음은 모이고 쌓여 나를 찾아올 것이다. 둔하고 약한 체력으로, 영어 앞에서 작아지는 자존감으로, 비교와 자기연민에 빠지는 건강하지 못한 자아상으로. '뿌린 대로 거둔다'의 반대도 있다. 내가 뿌리지 않음으로 거둘 수 있었던 것을 거둘 수 없게 된다.
'벌'은 대단한 게 아니라, 내가 이룰 수 있었던 것을 이루지 못한 현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것들은 그 자체에 상이 딸려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 또 책 모임에서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이다. 이 시간이 모여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위로를 받고 기쁨을 얻는다.
어쩌면 나는 벌도 받고 상도 받고 있는 중일까. 후회하는 대신 마음을 다잡는다. 올 한 해, 되도록 벌이 딸린 일은 조금, 상이 딸린 일은 풍성하기를. 아득한 것 같아도 결산의 날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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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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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냥 벌금 내면 안 돼?" 소모임 벌금제가 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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