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푸른사상, 2025년) 표지
안준철
상처가 꽃인 줄 모를 때 투쟁이 그저 싸움인 줄 알았다
그러나 겨울 숲 지나 봄 숲에 이르는 동안 저 실낱같은 가지 어느 것 하나
단단하지 않은 가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잔가지의 결기가 허공을 물었다 놓으면 꽃이 되었던 것
저 나무 마음에 양지가 있어 저리 단단하고 뜨거웠던 것
- <마음의 양지> 전문
김종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푸른사상)를 두 번 연거푸 읽었다. 시인에게 삶의 곤경이 없었다면, 이런 울림이 큰 시를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앞에 실린 시 제목이 '마음의 양지'인데 이 시는 '상처'로 시작한다. 그래서였을까. 이 시를 양지가 아닌 음지의 마음으로 읽었다. 음지에만 머물지 않는 역동성을 발휘하는 음지다.
"상처가 꽃인 줄 모를 때 투쟁이 그저 싸움인 줄 알았다"는 구절은 상처가 꽃인 줄 알았기에 투쟁이 그저 싸움에 그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한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역동성이 발휘되는 지점인데, 이 시에서는 "겨울 숲 지나 봄 숲에 이르는 동안"이 그 변화의 지점이겠다. 화자는 이 과정을 통해 "저 실낱같은 가지 어느 것 하나/단단하지 않은 가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고백한다.
"저 잔가지의 결기가 허공을 물었다 놓으면 꽃이 되었던 것"이라는 표현도 참 좋다. 추운 겨울철이라 가지는 허공을 물었다 놓을 힘이 없지만 "저 나무 마음에 양지가 있어" 약한 나뭇가지가 결기를 보일 수 있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나는 화자의 마음이 음지에서 양지로 화학적 변화를 했다고 풀이했다. 오독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1부 두 번째 시에서 화자는 "깊은 침전에서 일어나 소나무 숲에 닿는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긴 울음에서 걸어 나와 한 걸음 내디디니 한 걸음이 떼집니다"라는 구절이 중요했다. 울음이 울음에서 그치지 않고 "또 한 걸음 내디디고 다시 또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떼는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어서다.
어둠의 여정
시 <어둠을 읽는 방법>에서는 화자가 '유성우'를 만나기 위해 "먹빛 어둠을 찾아" 나선다. "지독한 어둠을 만나 캄캄하게 울던" 화자는 "이윽고 찾아든 별의 순간"을 만나고 "어둠에 들지 않고는 어둠을 관통하는 일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김종숙의 시는 나무에서 어둠으로 그 역동성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러다가 "세상의 색이란 색 다 품은 저녁과 바다와 한라산이 두텁게 껴안고 색을 낳는" 포구의 밤의 미학과 만나는 어둠의 여정을 보여준다.
포구의 밤
어둠이 이리 많은 색을 가진 줄 몰랐습니다
하루가 다 저 버렸다고 세상의 색이란 색 다 데려가 버렸다고
이제 포구도 기다릴 곳이 못 된다 돌아설 그즈음
어둠이 색을 물고 찾아들었습니다
물결이 상처를 꼬옥 물고 흔들리던 밤
어둠이 빛의 다른 이름이라는 그 절대 비밀의 문을 여는 순간이 왔습니다
- <물결이 상처를 물고> 부분
이 시의 "물결이 상처를 꼬옥 물고 흔들리던 밤"이라는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상처가 꽃이 되기 위해서는 제 상처를 물고 흔들리는 밤을 거쳐야 한다는 걸 시인은 지나온 삶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
어둠 시편 연작이라고 해도 좋을 이 빼어난 시들은 시인의 가난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의 서사로 이어진다. 시인은 한때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내 힘으로는 너를 더 갈칠 수 없어야/동상들도 많고 하나 있는 니 남동상 저걸 갈쳐야 안 것냐"라는 말에 "이런 게 무슨 부모야, 그럴 거면 날 낳지 말아야지"라며 차마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내뱉기도 한다.
모든 것이 가난 때문에 생긴 일이지만 그런 사정을 헤아리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뒤늦게야 찾아온 죄책감과 회한에 젖어 지금은 돌아가시고 아버지 앞에 바치는 '아버지 연작'들이 아프고 시리다.
시 <아버지 살림>에서 화자는 "10촉 전구 아래 애지중지 털고 기름칠해 살뜰히 보살피던" 연장 창고에 들렸다가 "주인 잃은 기역자 먹통 대패 송곳 펜치 짜구 빠루망치" 등과 "아뜩하니" 마주친다. "아버지 살림이 연장창고 하나라니/우리 식구 먹여 살린 연장이 아버지였는데"라고 탄식하며 아버지의 등뼈에 올라탄 지난날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으로 아버지를 복원한다.
그러니까 수평선을 띄운 건 당신이었습니다
과묵한 당신인 북통의 힘줄을 힘껏 당겼다 놓으면 푸르게 걸리는 수평선
우리 식구 당신이 걸어놓은 등뼈에 걸터앉아 남들처럼 살았던 겁니다
- <당신이 한일> 부분
이 외에도 시 <자작나무 숲>이나 <내소사 솟을연꽃살문>과 같은 시에서도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이 드러난다. 시리고 아픈 후회와 복원의 과정도 내 눈에는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음지의 마음에서 양지의 마음으로 바뀌고 상처가 꽃이 되는 과정으로 읽혔다.
김종숙의 두 번째 시집에는 호모 비아토르(라틴어, 여행하는 인간 길 위의 유랑), 콘트라포스토(이탈리어, 대비. 불균형 속의 균형 조각 기법. 짝다리 짚은 자세) 등의 외국어가 시 제목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헤븐리 카페 앞 가로등
바다 쪽으로 3도 기울어져 있다
저것은 그리움의 각도
너는 잠 못 드는 밤이다
외롭지 않고 그리움을 알 리 없다 고독하지 않고 고독한 바다를 동경할 리 없다
너는 자코메티의 걷는 사람
그러므로 우리의 기움은 생명의 허약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콘트라포스토
- <콘트라포스토> 부분
"바다 쪽으로 3도 기울어져 있는" 가로등은 "그리움의 각도"이자 "부족한 언어를 찾아 나선 시인의 불면"과 "시가 오지 않는 날 책보자기 싸 들고 거리로 나와 오지 않는 시를 기다리는 시인의 사색"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김 시인은 시집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고 한동안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진을 다 빼고 시를 써도 미진한 마음에 시를 향한 그리움의 각도가 항상 3도 바다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 아닐까.
<콘트라포스토>에서 멈추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김종숙 시인은 어둠과 나무와 아버지를 넘어와 '역사 연작'을 선보인다. 시 <공리자의 눈>에서는 감귤 향기 가득한 사월의 서귀포에서 오래전 핏빛 가득했던 사월의 서귀포를 소환하고, <어떤 청소>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사유로 이어진다.
김종숙 시인은 전남 화순군 남면에서 태어나 광주광역시에서 성장했다. 고향이 주암댐으로 수몰돼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았다. 그는 병원 약무직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순천에서 거주하다가 남편의 직장을 따라 또다시 떠돌이 삶을 살았다.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 역시 디아스포라 삶의 연장선상에서 제주도에서 쓴 시로 보인다.
해안가 정자에 나와 책을 펼쳐 읽는데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
저 낱장 바다가 일으켜 세운 주름을 읽을 일이지 글자를 읽을 일이 아니다
저 주름의 역사를 읽을 일이지 몇 줄의 언어로 필설해놓은 재현을 읽을 일이 아니다
재현은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선 기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리려 바다는 있다
동사(動詞)의 말로 거기 있다
- <아무래도 바다가 책(冊)이다>
정체된 명사가 아닌 역동성을 발휘하는 동사(動詞)의 말로 김종숙의 울림이 큰 시를 읽는 이 시간이 안이했던 나를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시간이지만 행복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바다가 책이다
김종숙 (지은이),
푸른사상,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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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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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향해 내뱉은 원망의 말, 후회하며 다시 쓴 시인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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