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틈만 나면 휴대폰을 켜는 아이들.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세대인걸까?
픽사베이
"선생님, 편견이 뭐예요?"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 시간,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질문을 던졌다. 사전적으로 편견이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즉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내려진 판단을 의미한다. 교재에 제시된 '외국인' 예시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했지만, 아이들의 표정에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엿보였다. 아이들이 수긍할 때까지 편견에 대해 설명하려 했지만 아이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요, 왜 그래야 돼요?"라고 반문했다. 아이들에게 편견은 아직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 듯했다.
아이들이 편견이 정말 없는 건지, 아니면 아직 잘 모르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아 모임에서 만난 지인에게 "요즘 아이들은 편견이 없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편견이 없는 게 아니라, 그냥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과연 아이들은 편견 없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타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세대인 걸까. 그 경계는 생각보다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편견 없음'과 '상관 없음'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은 비슷한 뜻으로 묶여서 교재에 등장한다. 선입견이 반복되고 굳어지면 고정관념이 되고 그 고정관념이 부정적이고 차별로 작동하면 편견이 된다. 어른들 세계에선 쉽게 만날 수 있다.
최근, 한 백화점 식당에서 노란 조끼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용이 제한된 사건도 편견이 일상 속에서 작동된 사례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얼마 전, 한 회사에 첫 출근한 다음날 '흰머리'라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부당해고 구제 심판이 진행되면서 회사에서 제출한 답변서를 받았는데 서류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아 흰머리는 나이 들어 보이고 나이 든 사람은 고집이 세서 민원 발생 우려가 있다.' 편견과 고정관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겠다.
요즘 초등학생 아이들 머리를 보면 무지갯빛으로 빨갛게 파랗게 물들인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이들은 '흰머리'도 그냥 하나의 색깔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교재를 채점하면서 아이들과 대화하다 보면 어른인 나보다 더 유연하고 빠르게 차이를 인정하며 "그게 뭐 어때서요?"라고 되묻는다. 어떨 땐 어른인 내가 획일화된 정답을 요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지인의 말처럼, 이 모습이 '편견 없음'이라기보다 타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태도에서 비롯된 '상관 없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디지털 환경에서 자란다. 자유시간을 주거나 틈만 나면 휴대폰부터 꺼낸다. 관심은 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 영상, 취향으로 향하고, 타인의 배경이나 정체성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군가를 판단할 기회도, 판단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우려도 있다. 편견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 관심 자체가 얕아진 것이라면 타인의 아픔이나 차별을 발견해도 '나와 상관없는 일'로 치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선 학교에서, 요즘 아이들은 친구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도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누가 괴롭힘을 당해도 '나도 피해를 볼까 봐'가 아니라' 굳이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어서'라는 인식이 작동한다고 했다. 편견은 줄었지만 공감의 체온도 함께 낮아지는 것이다.
조용하게 자라나는 편견
아이들의 무관심한 '편견 없음'과는 반대로, 디지털 환경은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또 다른 편견을 만든다. 소셜미디어와 알고리즘은 아이들의 관심사만 끊임없이 반복해 보여준다. 더 심각한 건, 알고리즘이 편견을 학습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검색한 데이터 속 편향을 인공지능이 그대로 재현하면 아이들은 그 결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다. 겉으로는 편견이 없는 세대 같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편견이 조용히 자라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학습되고 축적된 편견은 결국 디지털 공간을 넘어 현실의 태도와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논술 수업에서 찬반을 다루다 보면 편견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럼에도 편견은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기에 학교와 사회는 오랫동안 편견을 줄이기 위해 교육과 인권 감수성을 강조해 왔다. 갈등을 피한다는 이유로 부당한 상황에 눈을 감는다면, 분쟁은 줄어들지 몰라도 공동체의 책임과 연대 의식은 희미해진다. 누군가의 부당함을 보고도 아무도 나서지 않는 사회는 겉으로는 조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하거나 따뜻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방과 후 수업에서 아이들이 던진 질문과 대답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 편견이 사라진 사회는 분명 바람직하다. 그러나 '편견이 없다'는 말이 곧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들은 편견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직 세상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하기에 편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편견이 문제가 되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은 얼마나 많은 편견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편견 없음'을 넘어서

▲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건 '편견 없음' 보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어야 한다.
연합뉴스=OGQ
아이들의 눈에 세상은 아직 정답보다 질문에 가깝고, 판단보다 호기심이 앞선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편견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법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처럼 다시 묻고, 천천히 이해하면서 편견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어른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알려줘야 할 것은 '편견 없음'일까, 아니면 '관심 있음'일까. 결국 편견 없는 사회란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회가 아니라,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려는 마음을 지닌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는 능력, 다름을 존중하는 태도, 부당함을 목격했을 때 말할 수 있는 용기. 이러한 태도야말로 무관심을 넘어 편견을 진짜로 줄이는 힘이다. 방과 후 교실에서 시작된 이 작은 질문이 오늘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 다시 묻고 있는 것만 같다. 편견이 없다는 아이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그래, 그대로만 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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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없는 요즘 아이들, 혹시 이것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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