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 시, 아픈 어머니의 물수건을 적시며

등록 2026.01.18 15:28수정 2026.01.18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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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영하의 산문집 <단 한 번의 삶>에 장자의 무용지용 이야기가 나온다. 쓸모없어 베어지지 않은 나무가 천 년을 살아 큰 그늘을 만들고, 노래하지 못해 잡아 먹히지 않은 거위가 제 수명을 다한다는. 쓸모없음이 오히려 존재를 지키는 방법이 된다는 역설이다. 성공과 효율만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시대에, 이 오래된 우화는 묘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열일곱 살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피아노 연주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그날 이후 어머니를 졸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건반을 두드리는 동안 나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언젠가는 자유자재로 영혼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3등, 4등에 머무는 평범한 재능으로는 그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되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피아노는 가장 먼저 포기한 꿈이 되었다. 하지만 차마 버릴 수는 없었다. 열일곱에 샀던 그 피아노는 50이 넘도록 집 한구석에 모셔져 있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이자, 치열하게 살지 못했다는 자책의 상징처럼.


어느 날 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잠시 다녀오겠다'며 가볍게 나선 길이 어느덧 8년의 긴 매듭이 되었다. 태평양 너머에서 들려온 어머니의 가녀린 숨소리는 내 삶의 방향을 한순간에 틀어놓았다. 캐나다에서의 안온한 일상은 먼 이야기처럼 아득해졌고, 나는 서울 한 병실 좁은 간이 침대 위에서 어머니의 남은 생과 함께 나이들어 갔다.

새벽 세 시, 병실. 어머니의 체온계는 39도를 가리킨다. 나는 세면대로 달려가 수건을 적신다. 차가운 물에 담갔다 다시 짠다. 어머니의 이마에 올린다. 수건이 금세 뜨거워진다. 다시 세면대로 간다. 목덜미를 적신다. 이불을 살짝 덮는다. 10분 뒤 땀이 송골송골 맺히면 한 장을 걷어낸다. 다시 10분 뒤 몸이 떨리면 한 장을 더 덮는다.

의자에 앉아 졸다가 깜짝 놀라 깬다. 어머니의 숨소리를 확인한다. 다시 고개가 떨어진다. 다시 깬다. 수건을 짜며 문득 손끝에서 어떤 기억이 올라온다. 어린 시절, 감기에 걸려 끙끙 앓던 밤. 이마 위로 올려지던 차거운 수건의 감촉. 잠결에 느껴지던 어머니의 손길. 그때 어머니는 지금의 나처럼 밤새 이렇게 수건을 적셨을 것이다.

복도 끝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 마신다. 형광등 불빛 아래, 불이 켜진 병실은 우리 병실뿐이다. 가족들은 캐나다와 미국, 영국에 흩어져 있다. 급한 일이 생겨도 달려 올 사람은 없다. 지금 나는 우주에 혼자 던져진 것 같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장기요양 대상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그중 상당수가 가족의 돌봄에 의지한다. 나처럼 홀로 감당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명문대를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높은 연봉을 받으며, SNS에 올릴 순간들을 쌓아가라고 사회는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의 이마에 물수건을 올리고, 밤새 숨소리를 살피고, 그저 곁에 있어주는 이 평범한 시간들은 어떤 이력서에도 쓰이지 않는다.

만약 내가 재능을 가졌다면, 만약 중요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나는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했고, 쉽게 떠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것이 나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내가 빛나는 피아니스트가 되지 못했기에, 저명한 학자가 되지 못했기에, 지금 어머니 곁에 머물 수 있었다.


돌봄과 간병의 시간은 생산성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간들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누군가 아플 때, 누군가 외로울 때, 곁을 지키는 이들의 평범한 헌신이 사실은 세상을 지탱한다. 하지만 그 가치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반짝이는 삶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피었다 지는 작은 들꽃같은 삶이 있다. 그것이 세상의 대부분이다.

열일곱에 샀던 피아노를 떠올린다. 55세쯤 되던 해, 이사를 하면서 그 피아노를 처분했다. 언젠가 다시 배우겠다는 미련을 40년 가까이 품고 있었지만, 결국 손을 놓았다. 그때는 무언가를 포기하는 거 같아 서운했다. 그러나 지금,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안다. 그 피아노를 보내는 순간, 나는 사실 다른 것을 선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누군가의 곁을, 멀어져가는 꿈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을 택했다는 것을.

밤새 켜져있던 형광등을 끈다. 창밖에서 아침 소리가 난다. 어머니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나는 의자을 조금 더 끌어당긴다. 시간은 움직이지만, 우리는 그대로다.
덧붙이는 글 당신의 이마에 올려진 물수건. 밤새 조절한 이불의 온기. 졸다 깨며 확인한 그 수많은 숨소리들. 세상은 그것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 시간은 분명히 존재했고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힘든 당신에게, 같은 길을 걸었던 한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은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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