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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26.01.21 19:25수정 2026.01.29 22:14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겨울이 되면 아이와 함께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급격히 좁아진다. 바깥놀이는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추위를 핑계 삼아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이와 함께 사는 집에서는 이 변화가 곧바로 육아의 무게로 이어진다.
특히 황혼 육아를 하는 조부모에게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훨씬 버거운 시기다. 밖에서 에너지를 풀던 시간이 사라지고, 하루의 대부분을 실내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여전히 움직이고 말하고 놀고 싶어 하지만, 어른의 몸은 그 속도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래서 겨울 육아는 그저 추운 계절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제한된 공간 안에서 하루를 어떻게 견뎌내고 조율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는 것 같다.
긴 겨울, 하루의 리듬

▲ 대파를 자르고 난 후 뿌리 부분을 물에 담가 키워봐요, 새파랗게 새로운 파가 싹을 틔워요.
신혜솔
맞벌이인 아들과 며느리 대신 손자를 키우면서 힘들지 않게 습관을 들여놓은 것이 있다. 걸음마를 하기 전부터 도서관을 다닌 것이다.
나의 손자 로리는 만 세 살이다. 말이 빠르고 대화가 잘 된다. 질문도 많고, 이야기를 만드는 힘도 있다. 무엇보다 책을 좋아한다. 하루에 내가 읽어주는 책만 열 권 남짓, 혼자서 들춰보는 그림책도 그만큼 된다. 로리는 어린이집에서 조금 일찍 돌아오는 편이라, 오후의 많은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낸다. 두 시간쯤 책과 함께 놀다 오면, 아이의 에너지는 부드럽게 가라앉고 말은 더 또렷해진다.
집으로 돌아오면 짧은 집중 놀이 시간이 이어진다. 길게 끌지 않는다. 식탁에 담요를 씌워 작은 동굴을 만들거나, 상자 하나로 기차를 만든다. 때로는 요리를 하거나 가게 놀이를 한다. 로리는 이 시간에 온전히 몰입하고, 나는 그 몰입이 끝나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집중 놀이가 끝나면 로리는 혼자 놀기에 들어간다. 장난감 옆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나는 그 곁을 지키되 개입하지 않는다. 이 짧은 흐름은 답답한 겨울 육아를 한결 가볍게 만든다.
그 사이 로리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 있다. 식물에 물을 주는 일이다. 분무기를 손에 쥐고 잎마다 물을 뿌린다. 로리는 이 일을 아주 잘한다. 물을 너무 많이 주지도, 너무 적게 주지도 않는다. 분무기를 들고 화분 사이를 오가며 말한다.
"예쁘다." 말하기도 하고, "오늘도 사랑해~" 하며 웃어주기도 한다. 식물들은 매일 그 말을 듣고 자란다. 물론 이렇게 집 안을 돌보고 가꾸는 일은 결국 육아를 하는 나, 할머니의 몫이다. 하지만 그 몫을 혼자 감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로리를 이 작은 일에 초대해 함께하며 규칙적인 일이 되게 한다.
집 안에서 조용히 자라는 것들

▲ 녹두콩을 불려서 싹을 틔우면 숙주나물이 되지요. 더 푸르게 키우면 집안이 푸릇푸릇해서 싱그러워져요.
신혜솔
올 겨울에는 새싹도 키우고 있다. 녹두콩을 불려 싹을 틔우고, 대파 뿌리를 물에 담가 키운다. 겨울은 모든 것이 멈춘 계절처럼 보이지만, 집 안에서는 조용히 자라는 것들이 있다. 하루에 한 번 물을 주고, 하루에 한 번 변화를 바라본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눈다.
"어제보다 키가 컸네."
"초록색이 더 진해졌어."
이 말들은 로리에게 생태계를 이해하는 언어가 된다. 물은 자주 흘러넘친다. 바닥에 떨어지고, 옷에 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해준다. 살아있는 것을 돌보는 일은 원래 조금씩 흘리는 일이라고, 그 흘림을 함께 닦아내는 시간이 바로 배움이라고.
며칠 뒤 싹이 올라오면 로리는 작은 초록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건드린다. 자라는 것 앞에서 저절로 몸을 낮추는 아이. 그 모습을 보며 겨울이 꼭 버텨야만 하는 계절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저녁이 되면 퇴근해 돌아온 엄마, 아빠가 로리에게 묻는다.
"오늘 뭐가 제일 좋았어?"
로리는 또렷하게 대답한다.
"음... 할머니를 도와서 계란에 거품 만든 거요."
로리와 함께 보내는 겨울은 거창하지 않다. 대화가 오가고, 책장이 넘어가고, 잎사귀에 물방울이 맺힌다. 집중 놀이 뒤의 혼자 놀기, 틈틈이 식물에 물 주기, 매일 "예쁘다"라는 말이 오가는 집. 그렇게 겨울이어도 우리 집은 푸르고 싱그럽다. 겨울을 버티는 대신, 겨울을 이렇게 살아낸다. 로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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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가 화분에 물 주다 흘러넘칠 때 할머니가 해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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