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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교제폭력 3번의 신고,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여자들 ①] 반의사불벌죄와 경찰의 2차 가해, 살아남은 수진씨의 증언

등록 2026.01.20 15:22수정 2026.02.25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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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교제폭력 대응을 국정과제로 지정하면서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언론은 주로 굵직한 교제 살인 사건을 재조명하지만, 죽은 피해자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경험만이 문제를 알리고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신고부터 회복까지, 그들이 마주한 장벽은 무엇이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제도를 통해 개선할 수 있을까? 실제 사례를 통해 그 가능성을 모색해봤다.[기자말]
"나만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박수진(30대, 가명)씨는 경찰 조사를 받던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죽임을 당했다. 사회적 경각심은 강화됐지만, 제도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신고 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수사 기관 역시 마찬가지다. 법적 한계에 붙잡혀 소극적으로 대응하거나, 명백한 폭력을 '연인 싸움'으로 치부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수진씨도 1년에 걸쳐 세 번 신고하고서야 가해자인 전 남자친구에게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첫 번째 신고] 반의사불벌죄 조항, 경찰 개입 못 하게 막아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타지로 이사 간 지난 2021년 12월, 싱글맘인 수진씨는 낮에는 요식업을 운영하고, 밤에는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지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데이트 앱에서 만난 A씨는 '멀끔한 인상에 열심히 사는 남자'처럼 보였다. 8개월간의 교류 끝에 교제를 시작했지만, 다정했던 그는 점차 본색을 드러냈다.

수진씨가 남자 지인과 연락하는 모습을 보고 소주병을 던진 것이 시작이었다. 휴대폰을 빼앗아 액정을 깨뜨리고, 식칼로 속옷을 찢는 등 폭력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그녀는 "목을 졸리고 복부를 걷어차이기도 했다. 사정없이 맞았다"고 증언했다.

A씨가 폭행하고 집에 가지 못하게 한 어느 날, 참다 못한 그녀는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피해자의 처벌 의사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건을 현장 종결했다.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5 여성폭력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폭력 범죄 중 가장 빈번하게 나타난 유형은 폭행·상해(58.6%)였다. 문제는 폭행죄가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가해자를 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주일간 접수된 교제폭력 112 신고 내역 분석
일주일간 접수된 교제폭력 112 신고 내역 분석 경찰청

수진씨는 "그때만 해도 A씨가 불쌍해 보여 처벌을 원치 않았다"며 "내가 더 잘하면 될 거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친밀한 관계의 특성상, 교제폭력 신고자 중 상당수는 수진씨처럼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다.


경찰청이 2025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접수된 교제폭력 신고 1129건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 사건이 종결된 사례는 전체의 50.6%(571건)에 달했다.

교제폭력은 재범률이 높은 것도 특징이다. 동일 조사에서 신고 건수의 46.7%(527건)는 과거에도 비슷한 신고 이력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수진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출동해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A씨의 폭력은 곧 반복됐다.

이처럼 되풀이되는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처벌 의사와 관계없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별도의 교제폭력 관련 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관련 법안은 번번이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두 번째 신고] 폭력 인식 없이는 분리 조치 적용 안 돼

수진씨가 표현하기로 '아주 많이 맞은 날', 그녀는 살기 위해 두 번째 신고를 했다. 마침내 사건이 접수됐고, 수진씨는 "드디어 벌을 받겠구나, 다 끝나는구나"라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경찰 조사 이후에도 A씨는 수진씨를 계속 찾아왔다. 연인이었던 그는 수진씨의 주거지와 일터를 낱낱이 꿰고 있었다. 잘못했다고 빌거나,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수진씨는 또 한 번 신고를 취하했다. "거절했다간 또 난동을 피울까 봐 두려웠다"고 이유를 밝혔다.

2021년 스토킹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스토킹처벌법)이 시행되면서 이전에는 경찰 재량으로만 이뤄졌던 분리·보호 조치가 법적으로 보장됐다. 그러나 반복적인 신고 이력이 있었음에도 수진씨는 제대로 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고, 끈질긴 스토킹에 시달려야 했다.

경찰청 여성안전기획과 권혁용 경감은 "강력 사건 등 다양한 사건을 동시에 처리하는 과정에서 현장 대응을 맡은 경찰들이 교제폭력의 특수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해 법적으로 가능한 분리·보호조치를 적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이로 인해 위험성을 가볍게 여길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후에도 A씨는 계속 연락하며 자신이 암 환자라고 거짓말을 했고, 수진씨는 동정심에 관계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폭력은 잦아들긴커녕 더 빈번해졌고, 심지어 수진씨의 주변인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A씨는 그녀의 어머니를 밀쳐 넘어뜨리고, 미취학 아동이었던 아들 앞에서 그녀를 폭행했다. "네게 소중한 걸 다 죽여버릴 것"이라는 협박이 이어졌을 때, 수진씨는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세 번째 신고] 법 적용, 보호 시작

2023년 8월, 교제 1년 만에 수진씨는 세 번째 신고를 했다. 이번 신고는 이전과 다른 관할서에 접수됐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가 귀가 조치 후에도 그녀의 사무실을 찾아와 난동을 피우자 스토킹처벌법을 적용해 A씨에게 한 달간 100미터 이내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후에도 가해자는 수백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2023년 7월 개정된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전화·문자·SNS 등을 이용한 전기통신 접근금지 명령이 수진씨 사건에 적용되면서 더 이상 연락은 이어지지 않았다. 형식적으로만 이뤄졌던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조치가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신고가 접수된 이후에야 긴급응급조치가 시행된 수진씨의 사례처럼, 늦은 대응으로 추가 피해가 발생하거나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이어지자 지난해 8월 경찰청은 '교제폭력 대응 종합 매뉴얼'을 배포했다.

기존에는 스토킹 요건(▲상대방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속적·반복적 ▲접근 등의 행위가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유발했는지)을 충족했는지 판단한 뒤 보호조치를 했지만, 새 매뉴얼에서는 일회성 폭력이라도 현장 경찰이 위험하다고 판단하면 접근금지 등 긴급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접근금지 등 긴급응급조치는 그 기간이 1개월 내로 제한돼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위치추적 전자장치 부착, 유치장·구치소 유치 등 잠정조치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피해를 당한 경우에만 적용된다.

수진 씨가 A씨에게 받은 연락 재구성 세 번째 신고 이후 접근금지령이 실행되고도 연락했다.
▲수진 씨가 A씨에게 받은 연락 재구성 세 번째 신고 이후 접근금지령이 실행되고도 연락했다. 판결문 범죄일람표

가해자는 떠났지만… 피해자 보호와 제도 개선 필요

법적 처벌만 남겨뒀다고 믿었지만, 곧 또 다른 좌절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A씨가 아닌 수사 기관 때문이었다. 경찰들은 수진씨를 의심하며 필요 이상의 증명을 요구했다.

수진씨는 조사 과정에서 '왜 자꾸 연락을 받아줬냐', '왜 다시 만났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다. 담당 형사는 "A가 반성을 많이 한다"며 "수진씨도 A에게 연락할 빌미를 제공했는데 앞으로 그러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수사 과정을 겪으며 수진씨는 자신을 탓하게 됐다. 그녀는 "여전히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어 본다"며 "사건 해결 과정에서 받은 상처가 가해자에게 받은 상처만큼이나 깊다"고 말했다.

수진씨의 사례는 교제폭력을 단순히 연인 간 다툼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수사 기관에 여전히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권 경감은 "교제폭력의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피해자 관점을 갖출 수 있도록 경찰 인식 개선을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사 과정에서 받은 상처는 그녀를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게 만들었다. 피해를 의심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경찰이 연결해 준 상담 치료조차 기피했다. 상처를 추스르지 못한 채 일상으로 내던져졌고, 가해자를 피해 이사 비용을 마련하느라 경제적 어려움도 겪어야 했다. 수진씨는 "아들 유치원도 못 보낼 정도로 일상이 완전히 꼬여버렸다"고 말했다. 여전히 약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가해자는 징역 10개월을 선고 받았고, 형기가 끝난 이후에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수진씨는 여전히 악몽 속에 살고 있다. 숱한 의심과 질문을 받아온 그녀는 이제 역으로 묻고 싶다고 했다. "사회가 피해자를 궁금해하기보다 가해자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냐"고.
#교제폭력 #반의사불벌죄 #스토킹처벌법 #젠더 #교제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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