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1.20 11:34수정 2026.01.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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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옆집 상희네 뒤란에는 사철나무가 있었다. 어찌나 무성했던지 담장 넘어 우리 집 안마당까지 쳐들어올 것 같아 움찔움찔했다. 겨울에는 검푸르게 잎사귀가 변했는데 빨간 열매가 구슬처럼 달려 있곤 했다. 상희는 빨간 열매를 따며 놀았다. 나도 하나 따려고 하면 상희가 눈을 흘겼다. 본디 내성적이었던 나는 멈칫하며 그만두었다. 그러다 가끔, 상희는 "세 개만 따. 더 이상은 안 돼!" 선심을 썼다. 설레는 마음으로 열매에 다가가 조심조심 열매를 만졌지만 나는 그만두었다. 예뻐서 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희네 언니가 말했다. "이거 꺾꽂이해도 잘 산다, 꺾어 줄까? 너네 뒤란에 심어" 옆에서 상희가 또 눈을 흘겼다. 나는 싫다고 도리질했다. 마음속으론 몰래 꺾어오고 싶을 정도로 욕심나는 사철나무가지인데, 상희가 흘기는 눈이 무서워 포기했다. "열매도 따면 안 돼!" 상희는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나는 머리를 깊이 끄덕였다. 장독대에 놓인 항아리가 저녁 햇살에 반짝반짝 빛났다. 공연히 눈물이 핑 돌았다.
상희네 툇마루에 앉아 언니와 '푸른 하늘 은하수'를 부르며 손 유희를 했다. 노래가 슬펐다.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이 부분을 부를 때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상희네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이 까무잡잡하고 체구가 작았는데, 옆집 동생인 나를 유난히 예뻐했다. "우니? 왜?" 나는 고개만 저었다. 언니도 시무룩해져서 우리는 손 유희를 그만두었다. 지금도 '반달' 동요를 들으면 그 장면이 떠오른다.

▲사철나무 보석 같은 열매를 달고 있는 사철나무,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최명숙
상희네 옆집에 살다 이사한 집이 지금 어머니가 사시는 집이다. 객지 생활하다 명절을 맞아 갔을 때였다. 마루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화단에 작은 사철나무가 있었다. 다가가며 어머니께 물었다. 웬 사철나무냐고. 윗동네 아무개가 모종을 주기에 심었다고 하셨다. 벌레가 잘 생기지 않고 사철 푸르니 좋지 않겠느냐며 웃으셨다. 아이들이 다 커서 객지로 나가고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만 계시니 그런 마음이 들었음직도 하다.
그때 심은 사철나무는 지금도 친정집 화단에서 자라고 있다. 세를 불려 작은 화단의 삼분의 일을 차지할 정도로 퍼졌고 잎사귀가 무성해 상희네 뒤란에 있던 사철나무 못지않았다. 전지 하거나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 제멋대로 뻗어나갔다. 밖에서 우리 집 마루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어머니는 누가 나눠달라고 하면 다 캐가도 좋으니 맘대로 가져가라고 했단다. 내가 발끈해 외쳤다. "안 돼요!" 어머니는 미소 지었다. 그 옛날에 있었던 일을 짐작하셨을까. 나도 민망해서 웃었다. 바람에 사철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지금 사는 아파트에서 천변 산책로로 나가면 사철나무가 지천이다. 가드레일 대신 사철나무를 심어 경계를 만든 곳도 있다. 빨간 열매가 꽃처럼 보석처럼 다복다복 달려 있다. 사철나무 앞에 서서 개울을 내려다보았다. 왜가리 한 마리와 오리 몇 마리가 한 물에서 놀고 있었다. 물 건너 큰길에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질주하는 게 보였다. 저렇게 질주하듯 세월이 벌써 수십 년 흐르다니, 기억 속에서는 어제 일 같은데.
사철나무를 볼 때마다 상희네 뒤란이 선연히 떠오른다. 유세 부리며 하얗게 흘기던 상희의 눈도. 그 유세 외에는 착한 아이였으니 그것 역시 놀이였으리라. 소심한 나는 움찔했지만. 지금 같으면 장난으로 받으며 나도 눈을 하얗게 흘기련만. 그러다 깔깔 웃고, 소꿉놀이하고, 푸른 하늘 은하수 부르며 손유희하고, 싫증나면 고무줄 놀이하고, 공기 놀이도 하련만. 소심하기만 했다. 어쩌면 내 유년은 그 소심함 때문에 더 선명하게 기억나는지도 모르겠다.

▲왜가리와 오리 개울에서 유유히 놀고 있는 왜가리와 물오리들, 그 평화로움이 아름답다
최명숙
빨간 열매를 가만히 만져본다. 동글동글하면서 차다. 하지만 나의 유년은 따뜻하다. 결핍이 많고 소심함 때문에 내색하지 못한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지라도. 그렇게 열매처럼 다복다복 쌓인 것들이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었으리라. 저 사철나무만 보아도 그날들의 서사와 감정이 실타래에서 실 풀려나오 듯 해 미소 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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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구슬 단 겨울 나무, 문득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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