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유대 국가를 약속하지 않았다

중동판 환단고기 ① 밸포어 선언

등록 2026.01.22 11:44수정 2026.01.22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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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 파문이 뜨겁다. 환단고기는 '잃어버린 영광의 시대'라는 서사를 제공하기 위해 쓰인 정치적 목적의 위서로 알려져 있다. 실용적 사고관을 중시하는 대통령은 진위 이전에 우리가 강대국이었다는 서사에 매력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신앙이 아니라 검증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 경계가 무너질 때, 과거는 현재의 정치에 동원되어 국민을 호도할 수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처럼 말이다.

다행히 역사학계의 탄탄한 연구 덕분에 이번 논란은 해프닝으로 그쳤다. 필자는 이제 이 문제의식을 해외 역사 인식까지 점검하는 계기로 확장하길 제안한다. 많은 독자들은 가자지구 전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국제사회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 중동판 환단고기가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1917년 영국의 밸포어 선언을 예로 들어보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발점으로 손꼽히는 이 선언은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해 아랍과 유대 민족 간의 불가피한 분쟁을 만든 계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작 67개 단어로 구성된 이 선언문에는 애당초 '국가'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가? 한번 직접 찾아보시라.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establishment in Palestine of 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 and will use their best endeavours to facilitate the achievement of the object, it being clearly understood that nothing shall be done which may prejudice the civil and religious' rights of existing non-Jewish communities in Palestine, or the rights and political status enjoyed by Jews in any other country.

Balfour Declaration 선언문 어디에도 국가는 없다.
▲Balfour Declaration 선언문 어디에도 국가는 없다. Public Domain

괴이하게도, 우리나라에서 국가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는 바로 민족의 고향(national home)이다. 당연히 영어권이나 유럽어권에서는 절대로 두 단어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 단어는 양자의 동일성을 거부하는 데서 유래되었다.

근대 유럽에서는 유대인들이 반유대주의와 시름하고 있었다. 1880년대에 들어 일단의 유대인들은 그 해결책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고, 이는 시온주의(Zionism)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은 스스로를 유럽인이라 믿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도, 유대 국가도 거부했다. 1897년에 시온주의자들이 독일 뮌헨에서 처음으로 대회(Zionist congress)를 열려고 하자, 유대인들이 거세게 반대해 개최 몇 주를 앞두고 장소를 스위스 바젤로 급히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 역시 경계했다.

시온주의자들은 반발을 줄일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유대 국가가 아닌, 민족의 고향이라는 위장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다음은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결의한 시온주의의 공식 목표다.


Der Zionismus erstrebt für das jüdische Volk die Schaffung einer öffentlich rechtlich gesicherten Heimstätte in Palästina.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에서 공법으로 보장받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Basel Program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정의했다.
▲Basel Program 1897년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시온주의의 목표로 정의했다. Public Domain

숨은 의도야 어쨌든 민족의 고향은 대외적으로 비정치적인 목표로 선전되었다. 1922년 영국의 처칠 백서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나 언어, 문화가 종속되거나 사라질 만한 일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서 완전한 자치 정부 수립을 장려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영국은 애초에 유대 국가를 원하지 않았다. 영국의 중동 정책은 이라크 유전 지대를 확보하는 데에 있었고, 팔레스타인은 유사시에 군대를 파견할 통로로 필요했다. 그런데 프랑스도 팔레스타인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을 위해 민족의 고향을 만든다는 명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을 독차지한 것이다.


1차 대전 때 유대인들이 거금을 빌려준 대가로 유대 국가를 약속받았다는 서사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빌려준 사람도, 빌린 사람도, 금액도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 전후에 영국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밸포어 선언은 미국의 참전을 이끌어내기 위한 외교정책이었다. 이 역시도 거짓이다. 미국의 참전은 밸포어 선언보다 반년 이상 앞선다.

밸포어 선언이 유대 국가를 약속했다는 서사는 이 모든 역사적 배경을 왜곡한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에서 특정 진영이 만들어낸 '위서'다. 유대 사회 내부에서조차 유대 국가에 대한 반대가 강했던 사실을 감추고, 영국의 약속이 이스라엘 건국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선전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외교부의 팔레스타인 개황은 밸포어 선언이 "유대인 국가"를 약속했다고 기술한다. 국립외교원 전·현직 인사, 중동 전문가 등 대다수 학자들도 유대인들이 전공을 세워 유대 국가를 약속받았다는 서사를 책과 언론, 강의 등에서 공유하고 있다. 이렇게 검증되지 않은 서사는 수십 년간 반복해서 인용되며 사실처럼 굳어져 중동판 환단고기를 만들어냈다.

외교부 팔레스타인 개황(p. 18) 밸포어 선언이 유대인 국가를 약속했다고 잘못 기술한다.
▲외교부 팔레스타인 개황(p. 18) 밸포어 선언이 유대인 국가를 약속했다고 잘못 기술한다. 외교부

이 연재물에서는 이러한 비역사적 서사가 제작되고 유통되는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이는 단순히 무엇이 진실인가를 밝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개선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환단고기는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그릇된 역사적 인식으로 인해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이-팔 분쟁을 '피치 못할' 불운한 갈등으로 그려냈고, 그 과정에서 가해자를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1919년 미국의 킹-크레인 위원회가 팔레스타인 현지를 조사하고 남긴 기록은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선명히 밝힌다.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의 고향은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로 만드는 것과 같지 않다. … (그런데도) 시온주의자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토지를) 매입해 팔레스타인의 비유대 주민들을 거의 모조리 쫓아내려 하는 사실이 유대인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었다.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중동사 #세계사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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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독립연구자.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 저술(2023 우수출판콘텐츠, 2024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 선정). 서울국제도서전(2024), 대한적십자사, 월드비전 등에서 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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