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핵시민행동이 5일 부산 기장군 고리원전 앞에서 기자회견 후 '탈핵희망전국순례'를 시작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여론조사의 근거가 된 11차 전기본 자체도 기술적·경제적 타당성 측면에서 중대한 한계를 안고 있다. 핵심은 원전의 '경직성' 문제다. 전력 계통 공학적으로 원전은 출력을 수시로 조절하기 어려운 전원이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태양광과 풍력 등 변동성 재생에너지를 확대해야 하는 시점에서, 경직된 대형 원전 비중을 동시에 높이는 것은 전력망의 안정성을 심박하게 위협하는 선택이다.
재생에너지 공급이 넘쳐날 때 원전의 출력을 강제로 낮추는 '출력감발'이 잦아지면 원전의 경제성은 급격히 하락하게 된다. 송전망이 주변국과 촘촘히 연결된 유럽 국가들과 달리, 독립된 계통을 가진 한국에서 대형 원전을 추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위험할 뿐만 아니라, 향후 제대로 가동되지 못한 채 방치되는 '좌초자산(Stranded Assets)'을 양산할 위험이 매우 크다. 11차 전기본은 이러한 전력망의 유연성 부족과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 가능성을 시민들에게 정직하게 공유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원전이 AI 시대를 위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호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곧 수립될 12차 전기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재설정해야 한다. 12차 계획은 11차 계획이 남긴 오류와 한계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정책 결정의 패러다임을 단순한 '숫자'에서 '숙의'로 전환해야 한다. 에너지 정책은 단순히 찬성표의 머릿수를 세는 다수결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위험과 비용, 그리고 책임을 어떻게 공정하게 배분할 것인지 논의하는 민주적 과정이어야 한다.
이를 위해 12차 전기본은 다음과 같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숙의 민주주의 모델의 전면 도입이다. 단순 여론조사를 넘어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호 토론하고 학습하는 공론조사 방식을 통해 숙성된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 원전의 실제 발전 단가뿐만 아니라 사고 위험 비용, 미래 세대가 짊어질 폐기물 관리 비용까지 포함된 투명한 정보 공개가 그 전제가 되어야 한다.
둘째, 공급 확대 중심에서 '수요 관리와 유연성' 중심으로 정책의 축을 옮겨야 한다. AI 시대를 명분으로 발전소부터 짓겠다는 발상은 20세기형 사고방식이다. 에너지 효율 혁신과 가상발전소(VPP), 수요 반응(DR) 자원을 확충하여 전력망의 지능화와 유연성을 꾀하는 것이 국가 경쟁력을 위한 진정한 해법이다. 셋째, '정의로운 전환'의 원칙을 확립해야 한다. 원전 인근 지역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에너지 시스템을 멈추는 제도적 개선안이 담겨야 한다.
결국 질문이 왜곡되면 민주주의도 왜곡된다. '국민 90%가 원전을 필요로 한다'는 제목은 강력해 보이지만, 그것이 어떤 질문과 전제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그 숫자는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봉인지가 될 뿐이다.
에너지 정책은 수십 년간 되돌릴 수 없는 국가의 에너지 경로를 고정시키는 결정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찬성표가 아니라, 더 깊은 질문과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책임 있는 정치다.
12차 전기본은 숫자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는 계획이 아니라, 갈등과 불확실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진정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하는 계획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말하는 공론화는 민주주의의 이름을 빌린 또 하나의 요식 행위이자 절차적 정당성 확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정부는 이제 여론조사라는 숫자의 늪에서 나와 시민들과 함께 지속 가능한 미래를 향한 진정성 있는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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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90% 원전 필요"? 숫자 뒤에 숨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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