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9년 2월 24일 '광주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는 전옥주(사진 맨 왼쪽)씨.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보고서 216쪽.
진상규명조사보고서
평등하지 않은 진실
'폭도에 의한 폭동'으로 폄훼되었던 '광주사태'는 민주화 이후 1995년 특별법 제정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법적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현재는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반영하는 논의가 이루어질 정도로 5·18은 명실상부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화와 기념사업, 피해보상의 해결 방식은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에 대한 요구를 외면해 왔다.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 전쟁이나 국가 폭력 등 인권 침해의 과거를 청산하고 정의와 평화를 확립하는 일련의 과정과 조치)'를 추구하는 과거사 청산의 의의가 현실 정치 속 타협의 산물로 전락하면서 국가폭력의 진상을 밝히려는 피해자의 염원이 묵살되어 온 것이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5·18의 진상규명 운동과 인정투쟁은 5·18의 진실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항쟁의 역사는 무명의 시민들보다 도청을 지킨 시민군을, 항쟁에 동등하게 참가했던 여성보다 남성 주체를, 넝마주이보다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명되었다. 이러한 위계 안에서 여성이 겪었던 성폭력은 고백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밝혀서는 안 될 사실, 피해여서는 안 되는 사실로 배척당해 온 것은 아닐까.
1989년 청문회에서 성폭력이 공론화되고 진상규명의 대상이 되었다면 보상이 인정되는 5·18 피해의 범주는 달라졌을 것이다. 청문회에서의 규명이 실패했다 할지라도 1~7차에 이르는 보상심사에 성폭력 피해신고가 접수된 것을 반영하여 '5·18보상법'을 개정했다면 성폭력 증언은 묵인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성폭력 증언의 45년간의 공백이 당사자의 침묵이 아니라 사회의 외면이고 부인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침묵은 피해자 책임 아닌 사회의 문제
5·18 성폭력 증언은 이처럼 겹겹이 쌓인 어려움 속에 놓여 있었다. 총과 칼을 든 계엄군에 의한 극단적인 공포 속에서 여성들은 성적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로 낙인찍고 모든 진실을 억압했던 신군부의 절대 권력 앞에서 계엄군, 궁극적으로는 국가에 의한 범죄를 고발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성폭력을 여성의 품행 문제로 비난하거나 '남부끄러운' 피해는 쉬쉬하길 종용했던 뿌리깊은 가부장제는 여성의 성폭력 증언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왔다. 이러한 가부장적 위계질서는 5·18 항쟁 공동체 내부에도 존재했다. '폭도'이자 '여성'에게 가해지는 이중의 낙인은 말해도 들리지 못할 것이란 좌절과 체념을 피해자가 갖게 했다. 증언이 되지 못하는 말은 비명이 되고 흐느낌으로 남는다.
피해 증언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있다. 나의 고통이 타인에게 인정받고 공감받을 수 있다는 믿음, 증언으로 지탄받는 것은 피해자인 자신이 아니라 가해자일 것이라는 확신. 즉, 내가 속한 공동체의 공감적 윤리와 제도적 정의에 대한 신뢰가 전제될 때 피해 증언은 감행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도, 지금도 피해자가 사회에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따라서 앞선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5.18이 있고 난 뒤 45년 동안이나 당신은 왜 알지 못했던 겁니까?"
45년의 공백은 피해자 증언의 의도나 진위를 의심할 단서가 아니다. 여성주의 트라우마 연구자 주디스 허먼은 '침묵의 공모(conspiracy of silence)' 개념을 통해 특정 폭력이 사회문제화되지 않는 구조에 대한 공동체 책임을 지적한 바 있다. "폭력과 학대가 발생했을 때 사회가 집단적으로 외면하고 침묵함으로써 가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구조"는 과거사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여성들이 놓인 구조였다.
이 구조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이 침묵을 당당히 깬 이들이 존재한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이 피해자의 수치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폭력이며 국가의 책임임을 선언하고 정의와 치유의 길을 새롭게 열고자 하는 여성들. 그들은 '열매'이다.

▲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 을 제기한 열매. 2024.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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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폭력 치유와 회복을 위한 단체 '열매'의 연구 활동가입니다. 국가폭력과 젠더폭력이 겹쳐진 곳에서 들려지지 못한 여성 증언을 청취하고 당사자의 곁에서 지연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부하고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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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폭력 증언의 긴 침묵을 의아해하는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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