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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쟁으로 봉쇄된 시민을 살린 15곳의 거대한 구멍

    [두브로브니크 한달살기] 한국의 민속촌을 닮은, '루페' 민족지학 박물관

    등록 2026.01.27 08:47수정 2026.02.05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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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브로브니크 한 달 살기를 하며 가장 든든한 아군은 '두브로브니크 패스'다. 총 13곳의 박물관과 명소를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이 마법 같은 패스권 덕분에, 우리는 날씨를 살펴가며 느릿느릿 도시의 속살을 들여다본다.

    어느 나라를 가든 그들의 삶과 문화를 가장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곳은 박물관이다. 오늘은 두브로브니크의 '거대 곳간'이라 불리는 루페(Rupe) 민족지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올드타운에서도 제법 높은 지대에 자리 잡은 이곳은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박물관 외관의 거대한 파란색 철문. 올드타운 높은 지대에 요새처럼 우뚝 솟은 루페 박물관 입구. 과거 곡물 저장고였음을 증명하듯 단단한 철문이 인상적이다.
    ▲박물관 외관의 거대한 파란색 철문. 올드타운 높은 지대에 요새처럼 우뚝 솟은 루페 박물관 입구. 과거 곡물 저장고였음을 증명하듯 단단한 철문이 인상적이다. 김봉석

    암반을 뚫어 만든 15개의 거대 구멍, '루페'

    박물관 이름인 '루페(Rupe)'는 크로아티아어로 '구멍들'이라는 뜻이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왜 이런 이름이 붙었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철창 너머 발밑으로 아찔하게 깊은 암반 구멍들이 보였다.

    과거 두브로브니크는 바다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탓에 전쟁이나 봉쇄 시 식량 공급이 끊길 위험이 컸다. 이를 대비해 국가 차원에서 암반을 깊게 파 지하 창고를 만들고 곡물을 비축했다. 땅속 깊은 곳은 온도 변화가 적고 습도 관리에 유리해 당시로서는 최첨단 과학이 집약된 저장 방식이었다. 이 구멍들이야말로 봉쇄의 공포 속에서 시민들을 버티게 한 '생명선'이었던 셈이다.

    발밑으로 펼쳐진 아찔한 깊이, 도시를 살린 '생명의 구멍'. 철창 너머 암반을 뚫고 들어간 거대한 저장고 '루페'의 내부. 전쟁과 봉쇄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시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지켜냈던 절박함과 지혜가 그 깊이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발밑으로 펼쳐진 아찔한 깊이, 도시를 살린 '생명의 구멍'. 철창 너머 암반을 뚫고 들어간 거대한 저장고 '루페'의 내부. 전쟁과 봉쇄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시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지켜냈던 절박함과 지혜가 그 깊이만큼이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김봉석

    이러한 도시의 역사는 1층 해양 역사 전시 공간으로 이어진다. 마치 거대한 범선 내부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천장에 매달린 밧줄과 돛 천, 그리고 정교하게 제작된 전통 범선 모형들이 해양 도시로서의 자부심을 웅변하고 있었다.

    거대한 범선이 된 박물관, 두브로브니크의 자부심을 품다. 루페 박물관 1층 전시장 전경. 천장에 걸린 실제 밧줄과 돛 천이 마치 거대한 범선 내부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을 넘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바다로 나아갔던 해양 도시 두브로브니크의 찬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거대한 범선이 된 박물관, 두브로브니크의 자부심을 품다. 루페 박물관 1층 전시장 전경. 천장에 걸린 실제 밧줄과 돛 천이 마치 거대한 범선 내부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곳은 단순한 전시장을 넘어,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고 바다로 나아갔던 해양 도시 두브로브니크의 찬란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김봉석

    맷돌과 오크통, 국경을 넘는 삶의 공통점


    2층으로 올라가면 땅을 일구며 살았던 민초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투박한 농기구와 생활 도구들 사이에서 유독 반가운 사물을 발견했다. 바로 '맷돌'이다. 먼 이국땅에서 만난 맷돌을 보니,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든 삶의 방식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드리아해 너머에서 마주한 낯익은 모습. 루페 박물관 한편에 전시된 맷돌. 형태와 쓰임새가 우리네 그것과 꼭 닮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국경과 인종은 달라도,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갈아 끼니를 준비하던 민초들의 고단하고도 정직한 삶의 방식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드리아해 너머에서 마주한 낯익은 모습. 루페 박물관 한편에 전시된 맷돌. 형태와 쓰임새가 우리네 그것과 꼭 닮아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반갑다. 국경과 인종은 달라도, 땅을 일구고 곡식을 갈아 끼니를 준비하던 민초들의 고단하고도 정직한 삶의 방식은 결국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봉석

    올리브유를 짜내던 석조 압착기(Olive Press)와 와인을 숙성시키던 묵직한 오크통, 이동 중 파손을 막으려 짚으로 감싼 유리병에서는 선조들의 지혜가 엿보였다. 한국의 민속촌을 거니는 듯한 친숙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먼 이국땅에서 만난 낯익은 삶의 흔적. 와인을 숙성시키던 묵직한 오크통과 이동 중 파손을 막기 위해 짚으로 정성스럽게 감싼 유리병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풍요를 지키려 했던 크로아티아 선조들의 세심한 지혜가 엿보인다.
    ▲먼 이국땅에서 만난 낯익은 삶의 흔적. 와인을 숙성시키던 묵직한 오크통과 이동 중 파손을 막기 위해 짚으로 정성스럽게 감싼 유리병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풍요를 지키려 했던 크로아티아 선조들의 세심한 지혜가 엿보인다. 김봉석

    계단을 오를수록 선명해지는 풍경 그리고 그리움

    3층 전시실에서는 화려한 전통 의상들을 만날 수 있다. 꽃무늬 스커트와 섬세한 레이스 블라우스를 보고 있자니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속 한 장면이 오버랩된다. 유리 케이스 안의 옷들은 수백 년 전 이 골목을 분주히 오갔을 사람들의 체온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케리비언의 해적' 속 한 장면처럼, 시간을 되돌린 곳. 섬세한 레이스 블라우스와 화려한 꽃무늬 스커트가 돋보이는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전통 의상. 금방이라도 마네킹이 깨어나 중세 골목을 누빌 것만 같은 생생한 패턴과 색감이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케리비언의 해적' 속 한 장면처럼, 시간을 되돌린 곳. 섬세한 레이스 블라우스와 화려한 꽃무늬 스커트가 돋보이는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전통 의상. 금방이라도 마네킹이 깨어나 중세 골목을 누빌 것만 같은 생생한 패턴과 색감이 여행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김봉석

    전시를 마치고 내려오는 계단 창가에서는 겹겹이 쌓인 붉은 지붕들이 내려다보였다. 지대가 높은 덕분에 창문 너머로 펼쳐진 올드타운의 전경은 마치 나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낡은 창틀에 담긴 두브로브니크의 오늘. 박물관 나무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선 곳, 작은 창문이 액자가 되어 올드타운의 붉은 지붕들을 비춘다. 거대 곡물 저장고였던 이곳에서 선조들이 지켜낸 것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낡은 창틀에 담긴 두브로브니크의 오늘. 박물관 나무 계단을 오르다 멈춰 선 곳, 작은 창문이 액자가 되어 올드타운의 붉은 지붕들을 비춘다. 거대 곡물 저장고였던 이곳에서 선조들이 지켜낸 것은 결국,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김봉석

    박물관을 나서며 다시 한번 발밑의 거대한 구멍들을 생각했다. 풍요로운 시절에는 그저 어두운 공간일 뿐이었을 이 구멍들이, 위기의 순간에는 도시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요새 같은 저장고 속에 담겼던 것은 단순한 곡물이 아니라, 어떤 시련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고자 했던 인간의 지혜와 끈질긴 생명력이었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평범하고 풍요로운 일상 속에서는 미처 보이지 않던 소소한 것들이, 정작 삶의 겨울이 닥쳤을 때 우리를 버티게 하는 '생명의 구멍'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눈앞의 화려함보다 발밑의 소중함을 먼저 챙겨야겠다는 다짐을 안고, 올드타운의 고요한 골목을 내려왔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두브로브니크 #민족지학 #박물관 #루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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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20년간의 안정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부부가 함께 은퇴 후 시작한 새로운 여정. 안정된 삶 대신 꿈을 선택한 40대 파이어족의 좌충우돌 '은퇴 후 삶'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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