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안부 전화'라는 말이 있었다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말에 따뜻해진 하루

등록 2026.01.27 09:08수정 2026.01.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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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관에서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이라는 이름으로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합니다. 수업 이야기를 연재해요.[기자말]
복지관 글쓰기 수업이 방학한 요즘, 나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차 안과 대기 공간에서 보낸다. 오늘은 스케이트장이다. 아이는 빙판 위를 돌고 있고 나는 난간 옆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장갑을 끼고도 손끝이 시렸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긁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고 김이 섞인 차가운 공기가 코 끝을 건드리는 날이었다. 이곳에서의 기다림은 늘 비슷한 결이었다.

이 전화를 받을까 말까


그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울렸다. 완전히 낯설지는 않은, 익숙함과 불확실함이 동시에 떠오르는 번호다. 아예 모르는 번호였다면 받지 않았을 테지만 잠시 망설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첫마디에서 목소리를 알아봤다. 매주 수업에 오셔서 글을 써오던 어르신이다. 글 때문에 통화한 적이 있어서 번호가 낯이 익었나 보다. 그 어르신은 글을 잘 쓴다는 말을 자주 듣는 분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제 안 오실 수도 있겠다고 짐작하고 번호 저장을 안 했던 거 같기도 하다.

어르신은 전화를 받아도 괜찮은 상황인지 연신 확인하셨다. 나는 아이를 기다리는 중이라 너무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살짝 긴장했다. 방학 중에 전화까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어르신은 다른 복지관 행사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면서 거길 갔더니 문득 내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고 하셨다. 안부 전화라고 덧붙이신다.

나는 순간 대답을 잃었다. 생각나서 카톡을 하는 일은 익숙하다. 그러나 생각나서 전화를 거는 일이 요새 있었던가? 싶었다. 그 말은 너무 느리면서 너무 직접적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경했나 보다. 동시에 이상한 미안함도 밀려왔다. 방학 동안 나는 한 번도 어르신을 떠올리지 않아서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전화

이 대화는 오래된 기억을 건드렸다. 그러고 보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연락이 이런 방식이었다. 용건이 없어도 전화를 했다. 지금 뭐하냐는 질문 하나로 시작된 통화가 1시간을 넘긴 적도 있다. 목소리를 먼저 건네는 일이 관계의 시작이었다.


빙판에서 미끄러지는 아이들의 소리와 전화 속 호흡이 겹쳤다. 스케이트장은 여전히 추워서 의자에 닿은 허벅지가 서늘했다. 그런데 통화를 하는 동안 체온이 달라졌다. 공기가 바뀐 것은 아니지만 내 마음이 바뀐 건 확실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통화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통화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kelli_mcclintock on Unsplash

어르신은 건강을 묻고 겨울 잘 보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코끝이 뜨거워졌다. 누군가 내 겨울을 걱정해준다는 게 이렇게 큰 일인지 몰랐다. 아이를 쫓아다니는 일이 피곤하지만 재밌는 일이라고도 하셨다. 내가 무심코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이다.

전화를 끊기 전 어르신은 다시 한 번 그냥 생각이 나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아까는 대답을 놓쳤지만 이번에는 "생각나 주셔서 너무 감사하죠"라고 바로 대답했다. 글이 아니라 안부로 나를 떠올렸다는 사실이 정말 감사해서 그랬다.

통화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차가운 공간에 앉아 있지만 마음의 온도는 이전과 달랐다. 기다림의 시간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땀에 젖은 얼굴로 링크를 빠져나온 아이 손을 잡아주었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통화의 온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을 긋는 소리가 여전히 들렸다. 김이 섞인 차가운 공기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내 손끝은 이제 시리지 않았다. 기다림은 늘 비슷한 결이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다른 색깔을 가진 시간이었다.
#내인생풀면책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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