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 제주도는 물론 제주시의 상징 건축물인 관덕정. 1947년 3월 1일, 이 광장에서 발포된 총성으로 '제주4.3항쟁'이 시작되었다.
이영천
그로부터 1년 뒤, 미 군정청이 무력으로 제주를 가두어 포위한다. 왕조의 재림이다. 다만, 제9연대장 김익렬이 그 포위를 풀고자 했다. 그는 명령보다 양심에 따랐다. 무력 대신 대화를 택했고, 총 대신 눈을 맞추려 했다. 1948년 4월, 남로당 무장대와 협상을 통해 "도민을 살리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그의 손발은 곧 잘리고 만다. 양심이 반역으로, 화해가 항명으로 뒤바뀌었다.
이후의 총성은 전부 미군 꼭두각시들이 쏜 것이었다. 극우 청년단이 남로당 무장대 복장으로 경찰서를 습격한다. 조작된 사건은 '반란 진압'의 명분이 되었다. 국가는 이를 계엄이라 불렀다. 그날 이후 섬 사람들은 타의로 범죄자 아닌 범죄자로 살아야 했다. 제주로 향하라는 명령을, 여수와 순천에서 군인들마저 따르지 않았다.
제주에 온 군경은 명령이나 규율이 없었다. 폭도는 그들이었다. 자의에 의한 살상이 자행된다. 마을마다 불길이 일었고, 집마다 방화가 자행됐다. 중산간 주민들 모두가 해안으로 내몰렸다. 먹을 게 없었다. 그랬으니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산으로 갔다. '소개(疏開)'라 했지만, 실상은 '소탕'이었다. 노인과 아이, 여인과 농부, 그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재판도 없이 총을 맞았고, 이름도 없이 구덩이에 묻혔다.

▲4.3의 아이들(1948년 5월) 한라산 중산간으로 쫒겨간 아이들. 소개를 빌미로 극악한 학살이 자행된 제주4.3항쟁은, 나라가 저지른 '제노사이드'였다.
제주특별자치도청(진상보고서)
북촌이 타고, 다랑쉬굴이 무너졌다. 섯알오름이 피로 물들었다. 그것은 바로 나라가 백성을 학살한 중대 범죄였다. 이념이 가른 전쟁이 아니라, 비겁한 권력과 친일 모리배가 조작해낸 '제노사이드'였다.
관덕정 앞은 도시의 일상으로 번잡했다. 평온해 보였지만, 결코 평화가 아니었다. 나라는 침묵했고, 진실은 땅속으로 묻혀 버렸다. 피의 섬은 그렇게 강요된 침묵에 고요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제주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 불러야 했다. 죄는 나라가 저질렀으나, 형벌은 백성 몫이었다.
2003년 10월, 국가원수로서 비로소 공손한 첫 사죄가 이뤄진다. 그리고 2006년 4월 3일 추모식에, 대통령이 다시 제주를 찾아 깊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사라진 성, 남은 바람
제주읍성이 사라졌다. 성곽이 사라진 자리를 바람이 채웠다. 흐르는 바람이 휑한 섬사람들 마음을 지긋이 다독인다. 빈터에 풀잎은 돋아나고, 바람이 옛 역사를 읊조린다. 옛 성곽을 돌아나가던 바람은 그치지 않고 불어올 것이다.

▲산지천 탐라문화광장 쪽에서 바라 본 산지천의 모습. 읍성을 관통하던 젖줄로, 북쪽 바다에 이르러 산지 포구를 이룬다.
이영천
제주목은 그렇게 바람이 쌓은 성벽에 의지했다. 사라져 애잔한 숨결만 남았다. 성벽이 헐린 자리에, 산지 포구의 물빛이 반짝인다. 돌 틈을 드나들던 바람이 시선을 한 곳으로 끌고 간다. 사람들은 읍성을 단순한 방어막이 아닌 수호신으로 기억하고 있다.

▲산지 포구 제주 읍성이 온전하던 당시로 추정되는 시기의 산지 포구. 바다를 행해 뻗은, 돌로 쌓은 짧은 접안 시설이 보인다.
제주특별자치도청
그러나 바람은, 제국의 야욕까지 함께 실어 날랐다. 일제 군부는 입헌정치의 외피 아래 군국주의 맹아를 싹 틔우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이 바로 제주의 목구멍, 산지 포구였다. 서울의 목구멍인 제물포를 장악했듯, 산지 포구를 오로지 하려는 야욕이었다. 1926년, 제주읍성의 돌들이 마구잡이로 헐려 산지 포구의 매축에 빨려 들어갔다.
그 바닷길은 섬이 바깥으로 잇닿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야욕에 눈먼 일제는, 그 길을 거꾸로 악용했다. 자원과 물산이 빠져나가고, 병장기와 폭력이 밀려들었다. 산지 포구는 그때 이미 일제의 창구로 장악 당했다. 섬의 숨결이 가쁘게 짓눌려갔다.

▲제주 외항 대형 쿠르즈 선박이 정박해 있는 제주 외항의 모습. 산지 포구가 제주 외항의 시작이었다.
제주특별자치도청
근대화라는 허울로 신식 항만이 되었으나, 거기엔 날카로운 발톱을 감춘 일제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겉으로는 발전이었으나, 실상은 수탈이고 기지화였다. 그래서 지금의 변화가 눈부시다.
성벽은 사라지고, 일제도 무너졌다. 성벽이 앉았던 흔적은 그러나 남았다. 오현단 부근의 성벽 170여 미터, 그리고 복원된 제주목관아의 처마 밑에 시간이 묻어둔 기억이 새싹처럼 돋아난다. 돌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 제주의 회한이 그리고 미래가 깃들어 있다.
억눌림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자존, 그것이 지금 염원으로 불어오고 있다. 제주는 여전히 바람과 돌의 나라다. 무너진 성벽을 대신한 그 바람이 지금도 제주의 얼굴로, 그리고 내일의 표정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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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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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수호신이었는데 '170미터'만 남은 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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