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지난해 11월 12일 오후 대전시 유성구 구암동 수능 제27지구 17시험장인 유성고등학교에서 수험생이 시험 유의사항을 확인하고 있다. 2025.11.12
연합뉴스
며칠 전, 딸을 수학 학원에 데려다 주는 길이었다. 자연스럽게 목표 대학 이야기가 나왔다. 미대 입시에서 목표 대학은 실기 준비의 방향을 좌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문제는 엄마인 내가 보기에 딸의 목표가 많이 높아 보였다는 점이었다.
고2 때의 모의고사 성적이 고3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에는 공감형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자식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성형이 되는 나로서는 현실적인 조언을 안 할 수 없었다.
"고3 모의고사는 고2 때랑 완전히 달라. 지금 그 점수, 나오기 힘들어."
"엄마,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그냥 꿈꾸게 내버려두면 안 돼?"
그 순간 딸의 반응은 예상보다 거셌다. 딸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오십이 넘어서 글을 쓰겠다고, 열여덟 살 소녀처럼 꿈꾸는 엄마는 괜찮으면서 왜 열여덟 살인 자신은 꿈꾸면 안 되느냐는 것이었다. 엄마인 나 역시 쉽게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도 입시는 현실이야."
입시는 현실이고 엄마의 글쓰기는 꿈이라는 나의 논리와 입시 또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라는 딸의 논리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대화는 끊겼고, 침묵이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관리형 독서실로 향하는 딸을 위해 에그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아침을 먹고 가라며 딸의 방문을 열었다. 반가사유상의 자비로운 미소까지는 아니더라도, 밤새 복닥거리게 했던 고뇌와 번뇌를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다.
"엄마, 내가 언제 아침 먹는 거 봤어?"
단순한 거절이 아니었다. 평소 딸의 식사 리듬조차 모르는 엄마라는 핀잔에 가까웠다. 딸의 아침을 챙기느라 정작 나는 밥 먹을 틈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국·영·수 공부는 잠시 접어두고 인성 공부부터 하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독서실에 가야 하니 참았다. 나도 출근해야 하니 또 참았다. 그 순간, 시베리아 기단보다도 매서운 냉기가 집 안을 덮쳤다.
제아무리 수험생이라도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고3은 꿈꾸면 안 돼?'라는 딸의 말이 계속 귓가를 맴돌았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엄마 말이라면 징글징글하게 안 듣던 딸이었다. 현실적인 조언은 대부분 흘려보낸 채, 그저 꿈을 좇던 학생이었다.
재수까지 하면서도 꿈을 낮추지 않았고, 원하는 대학에 지원했다가 보기 좋게 탈락하기도 했다. 대학 선택도, 취업도, 결혼도, 워킹맘으로 버텨온 시간도 모두 내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 역시 온전히 내 몫으로 껴안았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다. 꿈을 좇으며 살고 싶다는 딸의 외침은, 그 누구도 아닌 엄마인 나와 꼭 닮은 데칼코마니였다.
딸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던 때였다. <오마이뉴스>에서 기사 알림이 도착했다. 정현주 시민기자의 그 기사였다. 마치 오늘의 나를 향해 쓰인 글처럼 느껴졌다. "가정교육은 1년 휴업하라"는 문장은, 딸의 인성을 들먹이며 한 판 붙을 기세였던 나의 마음을 차분히 눌러 놓았다. 언젠가 뒤통수를 맞아도 충격받지 말라는 기자의 당부는, 내가 은근히 품고 있던 딸에 대한 기대를 돌아보게 했다.
기사에 나온 청심원 사진을 보는 순간, 이 땅의 고사미들이 얼마나 두려운 시간을 건너고 있을지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내 딸의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걱정이 밀려왔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다른 용건은 없었다. 그냥 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딸과의 통화. AI생성 이미지
오마이뉴스
"오늘 저녁 뭐 먹었어?"
"커피랑 샌드위치."
순간 아침에 냉대 받았던 에그 샌드위치가 떠올랐지만, 섭섭함 대신 '든든히 먹고 다녀'라는 말을 선택했다. 딸도 아침 일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했다. 다만 엄마가 자신의 꿈을 단번에 꺾어버리는 것 같아 많이 속상했다고 했다. 그 말 앞에서는 더 이상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딸은 서로 잘못한 것이니 한 마디씩 돌아가며 사과하자고 제안했다.
엄마가 먼저 시작하라고 했다.
"사."
딸이 받았다.
"과."
내가 이었다.
"해."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두 번째 말은 '과'가 아니었다. 다시 말했다.
"사."
이번에도 딸은 다른 말로 받았다.
"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다시 시작했다.
"사."
그제야 딸이 내가 기다리던 말로 받아준다.
"랑."
"해."
그 순간,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풀렸다. 냉기류가 물러나고, 해를 머금은 온풍이 우리 사이로 천천히 흘러들었다. 곧이어 고사미의 위엄을 되찾은 딸의 지령이 떨어졌다. 달콤한 딸기 생크림을 먹고 싶단다. 이 사실을 고사미 아빠에게도 전했다.
고사미 '엄빠'는 각자 있는 자리에서 최선의 디저트를 준비했다. 밤 10시가 되어서야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식탁 위에는 달콤한 디저트가 풍성하게 차려졌다.

▲딸을 위한 달콤한 디저트 고3은 밤 10시에 먹어도 괜찮아.
이인자
딸의 가방에 홍삼을 넣으며
다음 날, 딸에게서 또 다른 요청이 왔다. 국어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지 않는다며 대치동의 한 강사의 현강(현장강의)을 듣고 싶단다. 아주 현실을 외면하는 건 아니었다. 반가운 SOS였다. 고사미 엄마는 곧장 인터넷에 접속했다. 학원 회원가입을 마치고, 수강 신청 알림이 뜨는 순간을 기다릴 준비를 했다.
딸의 가방도 몰래 점검했다. 먹다 버린 초콜릿 껍데기만 나오는 걸 보니, 당장 쓰러질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에 먹으라며 홍삼 한 팩을 대신 넣어두었다. 생각해보면 홍삼은 딸만 먹을 게 아니라, 나도 좀 챙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이 1년을 무사히 달릴 수 있을 테니까.
내게 쥐어진 바통을 조용히 한 번 더 꼭 쥐어 본다. 비록 느릴지라도, 고사미 엄마로서의 1년을 무사히 건너고 싶다. 그리고 미처 하지 못한 말 한마디를, 이제야 건네본다.
"딸, 고3도 꿈꿀 수 있다는 걸 엄마가 미처 몰랐네. 너의 꿈을 끝까지 응원할게."

▲고3 가방에 넣어 준 홍삼 딸 홍삼 먹고 힘내
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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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험생이면 다야?" 예비 고3 딸과의 파국 막은 전화 한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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