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송전선로. 대규모 발전 설비가 들어섰지만, 전력을 실어 나를 ‘길’은 여전히 병목 상태다. 발전소는 서 있어도 전기는 흐르지 못하고, 동해안의 에너지는 수도권 문턱에서 멈춰 선다.
진재중
동해안에서 생산된 전력을 수도권으로 보내는 마지막 관문인 하남시 감일동, 동서울변전소 증설 사업이 대체 부지 검토라는 변수로 불확실성에 빠졌다. 이 사업은 HVDC(초고압 직류 송전) 체계의 핵심 축으로 동해안 발전소와 수도권 산업 수요지를 직접 연결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이미 공정이 상당 부분 진행됐지만, 정부가 부지 이전 가능성을 검토하면서 사업 전반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전력업계는 지금 단계에서 사업을 원점 재검토할 경우, 기존 공사는 매몰 비용으로 남고 HVDC 전체 일정 역시 장기간 지연될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송전망 병목을 해소해야 할 시점에 오히려 새로운 병목을 만들어내는 상황"이라며 "동해안 발전소들은 가동하지 못한 채 유지·관리 비용만 계속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 논란의 근본 원인은 발전 능력이 아니라 송전 인프라의 한계에 있다. 전력 생산은 이미 가능하지만, 이를 실어 나를 통로가 막혀 있다는 점은 여러 차례 확인돼 왔다. 그럼에도 정부 대응은 일관된 해법보다는 갈등 관리에 머물며 정책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서울변전소 증설은 현 정부가 추진 중인 '에너지 고속도로' 구상의 핵심 사업으로, 이 사업의 지연은 곧 수도권 전력 공급 안정성과 국가 전력망 전략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부지가 변경될 경우, 새로운 민원과 인허가 절차가 뒤따르면서 사업은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동해안 발전소의 저가동 상태는 지속된다. 발전소와 송전설비는 남아 있지만 전력은 흐르지 못하고, 발전을 위해 감내해 온 환경적 부담과 투자 비용만 지역과 국가에 남게 된다. 전력망 특별법까지 마련해 놓고도 기간 전력망 확충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전력업계 안팎에서는 부지 이전 검토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한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동해안의 전력은 이미 준비돼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추가 검토가 아니라, 결단을 통해 전력을 흐르게 하는 일이다. 송전망의 마지막 연결이 늦어질수록 국가 에너지 전략의 공백 역시 길어지고 있다.
AI와 반도체 경쟁력의 숨은 조건, 송전망

▲ 동해안에서 수도권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고속도로가 막혀 있다. 전력을 실어 나를 길을 확보하지 못한 채, 동해안의 대형 발전소들은 정상 가동되지 못하고 멈춰 서 있다. 발전 설비는 완성됐지만, 에너지는 여전히 출발선에 묶여 있다.
진재중
에너지 고속도로 없는 에너지 산업은 출발선에 세워진 자동차와 다르지 않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갖췄다 해도, 달릴 도로가 없다면 움직일 수 없다. AI와 반도체 산업 역시 마찬가지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한 상태에서는 어떤 첨단 산업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이제는 순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발전소부터 짓고 송전은 나중에 고민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송전선로와 수요지를 함께 설계하는 통합적 에너지 전략이 필요하다. 전력 생산, 송전, 산업 입지를 하나의 체계로 묶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강원도 동해안에 멈춰 선 전력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산업 구조의 단면이다. 이 전력이 흐르기 시작할 때, 비로소 AI와 반도체 산업도 현실의 속도를 갖게 된다. 지금 동해안에서 멈춰 선 것은 발전소만이 아니다. 국가의 미래 전략 역시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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