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형무소 인근 지형도 청주형무소 인근 지형도
진실화해위원회
독립촉성국민회 간부와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남대희는 청주경찰서 유치장에서 밖으로 끌려 나왔다. "전부 옷을 벗어!" 뚱딴지 같은 소리에 사람들이 주춤거렸다. 인민군의 개머리판이 앞줄에 서 있던 이의 가슴을 향했다.
신속하게 옷을 벗은 남대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뒷결박을 당했다. 남대희와 동료들은 청주경찰서에서 약 300m 거리에 있는 서문다리로 이송되었다. 서문다리 아래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몇 개 있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파인 웅덩이였다.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벗겨진 이들을 웅덩이에 들어가게 한 후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뒷결박을 당한 이들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설령 달아난다 하더라도 그들은 홀딱 벗겨졌기 때문에 식별이 쉽게 되었다. 그때서야 죽음을 앞둔 이들은 저승사자들이 자신들을 청주경찰서에서 옷을 벗긴 이유를 알았다.
추석을 이틀 앞둔 1950년 9월 24일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에서 120명의 떼죽음이 있었다. 예산경찰서 경찰 김종열도, 독립촉성국민회와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남대희도, 대한청년단 활동을 한 용정동 이장 김용희도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비슷한 시각 당산 토성(토굴)에서 또 하나의 '죽음의 굿판'이 벌어졌다. 정치보위부 건물로 사용된 민주식 별장 지하실에 구금되어 있던 이들 95명이다.
전쟁 초기 후퇴했다가 수복 시기에 돌아온 청주경찰서 사찰과 모형사의 증언에 의하면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있던 우익인사 수십 명이 민영은 묘 아래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청주지역 신교식 등 8인의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및 강제연행(납치) 사건', 2008)
민영은 묘 아래인 당산토굴은 현재 체육공원이 형성되어 있다. 9월 24일과 25일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인민군 후퇴기인 1950년 9월 24일과 25일 사이에 청주·충북지역 우익인사는 몇 명이 학살되었을까?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청주에서 학살당한 이들은 미군 자료에 의하면 최소 449명이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최대 700여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인민군과 지방 좌익은 우익인사들을 집단 학살했을까?
UN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북한은 사면초가에 빠지는 신세가 되었다. 인민군 전선사령부는 후퇴명령을 내리는 한편, UN군 진주 후 적 진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활동할 자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대검찰청, '좌익사건실록 11', 1975)
이에 따라 청주지역에서도 1950년 9월 24일~25일 청주형무소와 청주내무서, 청주시정치보위부 등에 잡혀 있던 사람들이 학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익인사들을 집단학살한 사건은 국군 수복 후 부역자들을 불법적으로 학살하고, 감금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불운한 역사의 반복이었다.
역사에서 마땅히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이념과 사상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사람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를 꿈꾸는 것은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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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묻고 쇠망치로... 인민군 후퇴기, 청주에서 벌어진 집단학살의 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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