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군본부 정훈감을 지낸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전 상임대표
김도균
그러던 차에, 1992년 3월의 14대 총선을 앞두고 우리 지역 민자당 지구당 위원장으로부터 공천 받도록 조치해줄 테니 의향 있으면 출마하라는 연락이 왔다. 나는 주저 없이 응하여 급하게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신발이 달도록 열심히 뛰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좋아했다. 나를 유머 감각이 있고 정의감이 매우 강한 특출한 사람이라며 이번에는 어떤 당이냐에 관계없이 완도사람을 무조건 국회로 보내야한다는 명분의 여론으로 '완도인'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사실 내가 믿고 있었던 바는 첫째 완도가 강진지역보다 인구가 많다는 점이고, 둘째 완도는 일찍이 '신간회'의 본산이라 할 정도로 독립 운동가들을 많이 배출한 진보적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씨 표가 이승만 표보다 많이 나올 정도로 정치수준이 높은 고장이다.
특히 소안면은 항일독립운동으로 이름난 고장으로서 6.25전쟁 기간 중에는 친일경찰에 의해 1개 마을 남자들이 전원 학살당한 슬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고금면도 독립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실재 소안면과 금일면 고금면을 중심으로 몰표가 나올 것이 확실한 분위기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열열이 격려해 주었다.
공천발표 하루 전날, 모든 신문과 TV 응 매체에서 완도강진 민자당 지역구 공천예정자로 표명렬 장군이 결정되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청천벽력, 아침 뉴스에 그 전의 지구당 위원장이 공천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정치란 이렇게 손톱만큼의 양심도 의리도 없는 불의막급 비정한 것인가? 완전히 야바위꾼들의 놀음판에 속았다는 실망과 환멸이 들었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나는 너무 억울해 무소속이라도 좋으니 꼭 출마하겠다 버티고 있었다.
국민당중앙정치연수원 상근 부원장 역임
그러던 중 정주영 국민당 안보위원장으로 있는 이건영 장군(안기부장, 3군사령관역임)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입당하지 않아도 좋으니 한번 만나자는 부탁이었다. 나는 당사에 들려 정주영 대표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읽은 뒤 놀랐다. 이 분이 대통령되면 군대개혁은 물론 나라를 완전히 바꿀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어 입당했다.
신생 정당이니 당원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중앙정치 연수원' 원장직을 맡으라 했다. 후에, 원장은 현역 국회의원으로 바뀌고 나는 '상근 부원장'직을 맡았지만 사실상 당원교육에 대한 전적인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서 온 정열을 다 쏟아 부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곳에 기거하며 열과 성을 다해 당원교육을 진행했다. 교육과정은 내가 직접 경험했던 '새마을 지도자반 교육'과 국군정신전력학교를 창설하여 설치했던 '고급간부 반', 그리고 대만에서의 '정치심리전 지도자반'의 내용을 참고했다.
각 지구당 위원장들이 회장님에게"당원들이 중앙당 연수원만 다녀오면 완전 열성 당원으로 돌변해 옵니다"라 보고하며 교육인원을 늘려 달라고들 아우성들이었다. 나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주영 회장께서 당선되리라 확신을 가지고 열심을 다했으나 결과는 참패였다.
그 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당 중앙당 안보위원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입당하였고 노무현 정부 때는 열린 우리당 안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김근태 '열린 민주당' 당의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제가 선배님이 쓰신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라는 책을 읽고서 너무나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뿐만이 아니고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장군 중에도 이런 분이 계신 줄을 모르고 그동안 장군출신들에 대해 욕을 많이 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 했다.
열린 우리당전국구 의원 낙천
그 후 김근태 의원께서 전국구 국회의원에 출마해보지 않겠느냐? 권유해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공천심사 과정에서 낙천했다. 심사 위원 중 한사람이었던 김희선 의원께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국군의 날 변경', '국군의 정통성·정체성 회복', '국군의 연원을 독립군과 광복군에 두어야한다'는 주장을 담은 나의 오마이뉴스와 한겨레 경향신문 등에 기고글을 보았고, 방송 토론에 나갔을 때 내가 한 발언들에 큰 호감을 느끼고 있던 분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며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던 목적과 이유, 그리고 '민자당' 공천에서 떨어지고 '국민당'에서 활약 했던 일 등 일련의 과정들을 쭉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라며 "그런 깊은 뜻이 있어 정치를 하려고 했던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진즉 알았었다면 충분히 설명을 했을 텐데~ 이 당 저 당, 당적을 하도 많이 옮겨 다닌 기록 때문에, 권력에 기웃거리는 기회주의자처럼 오해되어 공천에서 낙천 되었습니다"라 말해주었다.
듣고 보니, 그럴 법도하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어이없게도 내가 마치 국회의원 금배지가 탐나서 정치 철새처럼 이 당 저 당 쫓아다닌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아마도 운명의 신이 내가 정치에 물들지 않도록 만들어주어, 지금까지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해 준 듯하다. 난 그것에 감사하며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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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 인격존중의 ‘민주군대’, 민족사적 역사의식이 투철한 자부심 넘치는 '민족의 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 왔음.
육군사관학교 졸업(18기).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졸업. 대만 정치작전학교 정규반 수료. 월남파병(1965년 맹호부대 소총중대).육군정훈감(준장),평화재향군인회 창설, 상임대표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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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입문 좌절기, 군대 개혁 꿈꾸던 장군의 고백과 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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