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지문 공원 흥인지문 옆으로 낙산 오르는 언덕이 비워져 공원이 되었다. 옹성을 두른 동대문과 주변 건물군이 땅에 지문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영천
이간수문과 오간수문을 지나던 성벽 자리는, 오래전부터 큰 상가들이 터줏대감 노릇을 하고 있다.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누가 힘이 더 센지 으르렁거리며 겨루는 모양새다. 전차를 움직이던 전기회사 자리가 대규모 상가로 변신하기까지, 이 땅엔 상처와 아픔이 손가락 지문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셈이다.
종로5가로 고개를 돌리면 성안 변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왕의 도시였던 한양에서 중심은 조금씩 옮겨갔고, 결정적으로 광화문마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일제강점기, 광화문이 옮겨지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을 때, 도성은 상징마저 해체되어 짓눌렸다. 성곽이 빙 둘렀다지만, 그 중심이 무너져 내린 셈이다. 남아 있던 성곽도 더는 이 도시의 주인 대접을 받지 못했다.
성 밖에서 캐낸 돌
1907년, 흥인지문 좌우 성곽이 철거되어 도로와 전차선에 자리를 내준다. 일제에 부역하던 친일파와 일인들로 구성된 '성벽처리위원회' 작품이다. 성곽이 사라진 자리로 이식된 근대화가 밀려 들었다. 도시는 빠르게 확장되었고, 성벽은 필요에 따라 잘려 나갔다.
2000년대 들어 열기를 띤 '성곽복원'이 1백 년의 역설을 어찌 떠안았을까? 부숴야 새로워질 수 있다는 '파괴지자(破壞之子) 유신지모(維新之母)'의 역설일까?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지금 새로 박힌 돌이, 옛 성곽을 이뤘던 돌이 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창신동 성곽 밖이 창신동이다. 조선총독부 청사와 경성부청 등 식민지 지배 기구 청사를 지으면서 이곳의 돌을 캐내 갔다. 멀리 정상이 단종을 그리워한 정순왕후가 올라, 하염없이 동쪽을 바라 본 '동망봉'이다.
이영천
성 밖을 내다보면 창신동이다. 성안에서 권력이 앗기는 동안, 성 밖에서는 돌이 잘려 나갔다. 일제의 조선총독부 청사와 경성부청 등 지배용 건축물을 짓는데 필요한 화강암을 낙산 일대에서 잘라냈다. 성을 이룬 돌과 똑같은 돌들이, 성을 지워내는 건물로 옮겨간 셈이다.
돌이 잘려 나간 자리 꼭대기에 전망대와 아담한 카페가 있어, 거기서 바라보는 도시가 즐거움을 선사한다. 전망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숭인공원이,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올라 동쪽을 바라보았다는 동망봉이다. 영조대왕이 새겼다는 '東望峰(동망봉)' 글자는 채석으로 잘려나가 흔적도 없다. 왕비의 발자국은 일제의 무분별한 채석으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왕비 거처였다는 '정업원'은 너머의 청룡사로 추정한다. 권좌를 빼앗기고 영월 청령포로 쫓겨가 죽임당한 낭군을, 생이 다하는 날까지 바라보았다는 왕비의 한은 헤아리기조차 힘들다. 저 봉우리에서 왕비는 어떤 구도의 길을 걸었단 말인가.

▲낙산 성곽 창신동 '채석장전망대'에서 바라 본 낙산 성곽. 성벽 너머로, 옛 도성 안은 물론 멀리 남산이 보인다.
이영천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그림처럼 전망이 좋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성곽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호를 위해 쌓은 벽 아래에서 가장 많은 노동과 한숨이 쌓였다. 전태일의 외침이 작은 기념관으로 남았고, 골목은 지금도 재봉틀 돌아가는 자잘한 소리로 가득하다.
창신동 바위산은 말이 없고, 잘린 돌들이 옮겨져 어떤 운명으로 살다 사라졌는지 자세히 기록되지 않았다. 성은 안쪽을 향해 설계된 구조이고, 바깥에서 벌어진 일까지는 지켜내지 못했다. 성 밖의 역사는 늘 이렇게 곁다리로 남겨졌다.
낮은 성곽이 지난 가장 두꺼운 시간
흥인지문 지척에서 북으로 언덕이 제법 가파르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많은 사연을 간직했음 직하다. 미국 감리교가 이 언덕을 주목한다. 부인진료소와 함께 교회(동대문감리교회)의 탄생 배경이다. 진료소는 나중 이화여대병원으로, 교회는 성곽을 깔고 앉게 되었다.

▲한양도성박물관 녹색 창문의 하얀 건물이 옛 병원 건물로, 지금은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이영천
2013년 전후로, 성곽 복원이 탄력을 받는다. 교회와는 협상과 송사 등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병원은 철거·이전으로 결정된다. 그 병원 건물 하나가 '한양도성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병원과 교회 자리가 비워져 '흥인지문 공원'이 되었으니 바람과 햇살에 자그마한 위로라도 되었을까?
성곽을 허물어 근대를 맞이했던 도시는, 다시 돈을 들여 성을 복원하려 한다. 그러면서 그 질곡의 역사를 설명하려 애쓴다. 허물었던 걸 기억하기 위해 남겨둔 흔적들. 설명이 필요해진 순간, 도성은 이미 또 다른 현재일 뿐이다. 낮은 낙산 능선을 걸으며, 이 도시가 얼마나 간절히 성곽에 의지했고, 또 얼마나 쉽게 성곽을 버렸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양도성 한양도성박물관에 전시 중인 한양도성 모형. 성곽과 운종가, 궁궐은 물론 주요 관청까지 세세하게 재현되었다.
이영천
길을 더듬어 오르다 보면 낙산이다. 낙타 등처럼 완만한 이 구간이 한양도성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낮다.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고 했던가. 이런 속담의 배경에 가장 잘 부합한 곳이 이곳 산자락이다.
조선 시대에도 비교적 낮은 이곳을 서민들 가옥이 그득 채웠다니 말이다. 그것은 삶의 가느다란 줄기였고, 기회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여하간 도성 안에서 버텨내야만 했다. 가장 낮은 성곽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가장 두꺼운 시간을 건너왔다.

▲낙산공원 성곽을 따라 낙산 정상에서 바라 본 낙산공원. 성곽 너머로 성북동이, 그 너머로 북한산이 조화롭다.
이영천
목장이던 자리가 남아 '낙산공원'이 되었다. 가축에서 짜낸 젓으로 쑨 '타락죽'이 그처럼 흔전하여 아쉬움이 덜 했을까. 여길 '타락산'이라 불렀던 이유가 분명해졌다. 낙산에서 보는 성안이 순해 보인다. 내사산인 낙산에서 나머지 3개 산이 눈앞인 듯 가깝게 보인다.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는 높은 빌딩이 없어, 마치 왕조 시대의 풍경을 보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혜화동에서 맺는 걸음
낙산공원을 둘러볼 게 아니라면, 여기서 성 밖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공원 암문으로 나가 바깥 성벽을 살핀다. 성 돌들이 제각각이다. 각기 다르게 다듬어진 성 돌의 모습에서 성이 쌓인 시간이 축약되어 쌓여 있는 모습이 무척 이채롭다. 세종과 숙종, 순조의 치세가 이 성 돌들에 그대로 투영되었을까?
성 바깥 좁은 길이 무척 정겹다. 완만한 능선 따라 가느다랗게 이어진 길의 운치가 경치를 압도한다. 물론 멀리 북한산이나 동소문동 풍경이 하찮다는 게 아니다. 성곽길이 선사해 주는 즐거움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시대별 성곽 성을 쌓은 돌 모양으로 시대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세종~ 숙종~ 순조로 시대가 바뀌면서 성 돌의 크기가 커지고 정교하게 다듬어 진다. 성벽 안쪽이 가톨릭대학교 교정이다.
이영천
성곽길이 혜화동에서 잘렸다. 성곽 안은 가톨릭대학교 캠퍼스 차지다. 성안으로 걷는 길이 여기 학교에 막혔다. 이 학교는 원효로의 성심학교에서 1928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1886년 조불 수호조약으로 가톨릭이 긴 박해를 벗어난다.
당시 조선 선교를 맡은 '파리 외방전교회'가 1892년 신학교를, 1902년 부속으로 예수 성심성당을 세운다. 그곳에서 신도를 가르치고, 포교하려는 의도였다. 신학교와 성당이 들어선 자리는 박해가 극심한 한강(새남터)과 용산 언덕(당고개)을 아우르는 곳이다. 선교사들 묘지도 있었다. 그 신학교가 더 안온한 터를 찾아 당시 성안인 이곳으로 찾아든 것이다.

▲창경궁로 창경궁로가 동소문(혜화문)이 있던 언덕을 깎아 낮추며 성벽을 잘라냈다. 맞은 편 언덕 위에 복원된 혜화문이 서 있다.
이영천
방어와 치국(治國)을 위해 쌓은 성곽이다. 그 한편에, 사람을 돌보고 선(善)을 행하는 일을 가르치는 공간이 자리 잡은 셈이다. 지키고 다스리는 도시에서 돌보고 행하는 도시로, 역할이 조용히 바뀌었다. 학교가 끝나는 곳에서, 언덕도 깎여 낮아졌다. 그 자리에 섰던 동소문(혜화문)은 억지로 옆으로 옹색하게 빗겨나 복원되었다.
내사산의 하나인 낙산은 끝내 높은 산이 되지 못했다. 그에 호응이라도 하듯, 성곽 또한 완전한 차단벽으로 군림하지 않았다. 그러나 낮은 이 구간에도 도성으로서 한양이 겪어낸 변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허물고, 캐내고, 다시 쌓고, 가지런하게 정리해낸 시간을, 혜화동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며 생각한다. 성은 많은 것을 지키지 못했지만, 우리가 어떤 도시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이 낮은 성곽길에 가장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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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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