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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설빔'을 만든 날, 가장 먼저 떠오른 한 사람

삼남매 설빔 단장에 열중하시던 할머니... 옷은 대신할 수 있어도, 기억은 대신하지 못했다

등록 2026.02.10 09:46수정 2026.02.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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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인 지난 7일 오후, 설을 앞두고 나는 사진 몇 장을 만들었다. 최근 SNS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른바 '디지털 설빔'을 직접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한복을 입고 찍은 건 아니었다. 평소의 내 얼굴 사진 위에, 디지털로 설빔을 입혔다. 클릭 몇 번이면 완성되는 이미지였다.

사진 속 나는 화사하고 단아한 한복 차림으로 한옥 대청마루에 서 있었다. 곱디 고운 분홍빛의 치마와 뽀얀 저고리를 입고, 배경은 나무 기둥과 마루가 어우러진 전통 가옥이었다. 그럴듯했다. 명절 분위기도 충분했다.


삼남매 설빔을 준비하던 할머니

디지털 설빔 AI 프로그램을 통해 간단히 사진을 만들어 보았다.
▲디지털 설빔 AI 프로그램을 통해 간단히 사진을 만들어 보았다. 유수영

그 사진을 저장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할머니였다. 어릴 적 설날이면 나는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었다. 소매 끝과 치맛자락에는 금박 꽃무늬가 줄지어 있었고, 머리는 단정히 땋아 올렸다. 새하얀 양말을 신고 명절때만 입을 수 있었던 한복을 입는 날은 괜히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졌다.

명절이 보름쯤 남으면 할머니는 유난히 바빠졌다. 명절 음식 준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자인 우리 삼남매의 설빔을 챙기는 일이 할머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사일로 투박해진 손으로 때가 타고 바랜 동정을 떼어내 풀을 먹인 새 동정을 달았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두꺼운 돋보기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골무를 낀 손으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어린 마음에 그 동정이 목에 닿을 때마다 까끌거려 싫었다. 고개를 조금만 움직여도 목이 쓸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불편함조차도 다 할머니의 사랑이었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할머니는 한복을 우물가에서 손으로 조물조물 빨아 마당 빨랫줄에 널었다. 햇볕을 쬐고 다 마르면 천을 덮고 다리미로 천천히 눌러 다렸다.

세탁 과정에서 금박이 떨어지면 할머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풀을 먹이고, 문갑 안에서 꺼낸 금박지를 얹어 작은 고무 망치로 통통 두드려 붙였다. 그렇게 손질된 한복은 다시 새 옷처럼 화사해졌다. 그 한복을 입고 나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을 맞았다. 쑥스럽고 어색했지만,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또렷하다. 설빔은 입는 옷이 아니라, '기다리고 준비되는 시간'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실제로 최근 몇 년 사이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디지털 설빔'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디지털 설빔이란, 설날에 새 한복을 실제로 입는 대신 프로필·SNS 콘텐츠 속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한복을 입혀 명절 분위기를 표현하는 행위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설빔'이 새 옷을 입고 명절을 맞이하는 의식이었다면, 디지털 설빔은 그 의미를 온라인 공간으로 옮긴 현대의 명절 문화인 셈이다.

누군가의 시간을 입는 일


색동한복 어린 시절에 입던 색동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AI로 다시 재현해 보았습니다.
▲색동한복 어린 시절에 입던 색동저고리와 빨간 치마를 AI로 다시 재현해 보았습니다. 유수영

디지털 설빔을 마련하는 방식은 간단하다. 직접 한복을 꺼내 입지 않아도 된다. 사진 한 장만 있으면 화면 속에서 누구나 설날 차림을 완성할 수 있다. 먼저, 설빔을 입을 본인의 사진을 준비해 AI 프로그램에서 명령어를 입력하면 짧은 시간 안에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로필 사진, SNS 이미지, 캐릭터 아바타까지. 명절의 새 옷은 휴대전화 앨범에 저장된다.

편리하다.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게다가 한복은 보관도, 관리도, 비용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디지털 설빔은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부합한다. 나 역시 실제 한복을 꺼내 입는 대신, 사진 한 장으로 설을 맞았다. 화면 속에서만 반짝이는 설빔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완성해두고도 마음 한 부분이 조금 허전했다. 디지털 설빔은 옷을 대신할 수 있어도, 기억은 대신하지 못한다. 까끌거리던 동정의 감촉,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소리, 금박을 다시 붙이던 손놀림 같은 것들은 이미지로 재현 되지 않는다.

설빔은 단지 '입는 행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입는 일이었다. 기다림이 있었고, 불편함이 있었고, 손이 갔다. 디지털 설빔은 그 시간을 생략한다. 대신 빠르고 깔끔한 결과를 제공한다. 어쩌면 우리는 전통을 잃고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을 덜 입는 법에 익숙해지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올해도 아마 실제 설빔을 입지 않을 것이다. 대신 사진 속의 나에게 한복을 입힐 것이다. 그 선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그 사진이 할머니의 손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명절을 준비하는 시간이 달라졌다. 그렇다면 설날이 주던 감정까지 함께 바뀌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질문을 품은 채 나는 휴대전화 속 사진들을 넘겨본다.
#디지털설빔 #설빔 #한복 #명절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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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나가는 인물과 장소, 고단한 날들에서 흘러나온 진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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