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켈로우스의 연회> 피터 파울 루벤스 · 얀 브뤼겔 1세, 1614-16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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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벤스와 브뢰겔이 함께 그린 <아켈로우스의 연회>를 떠올렸다. 화면 가득 펼쳐진 신들과 영웅들의 연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장면이다. 강의 신 아켈로우스가 테세우스와 다른 영웅들을 위해 베푼 만찬. 이 화려한 연회 장면 속에 신들과 영웅들이 모여 있다. 그들이 마시는 것은 넥타르, 먹는 것은 암브로시아. 불멸의 음료와 음식이다. 하지만 이 연회는 올림포스,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열린다.
복숭아와 암브로시아. 둘 다 불멸을 상징하지만, 복숭아는 시장에서 살 수 있고 암브로시아는 신의 식탁에만 있다. 이 차이가 동서양의 불멸관을 말해준다.
피닉스는 어떤가? 죽지 않는 이 새는 오백 년에 한 번 스스로를 불태워 재 속에서 부활한다. 장엄하고 극적이지만,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공포감도 가지고 있다. 오백 년마다 스스로를 불태워야 한다는 것. 죽음 없는 삶이 아니라, 죽음을 반복해야 하는 삶. 그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학과는 다르다. 학은 해마다 돌아온다. 조용히, 확실하게.
서양에서 불멸은 도전해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다. 그리스 신화는 이를 반복해서 경고한다. 프로메테우스를 보라. 인간을 사랑하는 그는 올림포스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신들만의 것을 인간과 나눈 죄. 제우스는 그를 카프카스 산에 묶고 독수리가 매일 간을 쪼아먹게 했다. 밤이 되면 간은 재생되고, 다음 날 다시 독수리가 온다. 영원한 고통. 불멸을 향한 도전의 대가였다.
이카루스는 또 어떤가.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에서 탈출하기 위해 아버지 다이달로스가 만든 밀랍 날개. "너무 높이 날지 마라. 태양이 밀랍을 녹일 것이다." 하지만 젊은 이카루스는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신들의 영역에 가까이 가려 했다. 밀랍이 녹고, 날개가 떨어지고, 그는 바다로 추락했다.
피터르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을 떠올린다. 거대한 풍경 속에서 이카루스는 화면 구석, 바다에 빠지는 두 다리로만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돌보고, 배는 항해를 계속한다. 누구도 떨어지는 소년을 보지 않는다. 불멸을 향한 도전의 무의미함을 화가는 보여줬다.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피터르 브뤼헐, 16세기 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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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나는 다시 십장생도 앞에 선다. 프리다의 고통, 클림트의 황금, 밀레의 피로, 고흐의 별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 죽음을 응시한 서양 화가들과, 영원을 일상에 담은 동양의 그림 사이에서. 서양의 화가들은 삶의 끝에서 치열하게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프리다는 두 개의 심장을, 고흐는 소용돌이치는 별을. 그들의 그림에는 절박함이 있다.
그리고 담담하게 영원을 바라보는 십장생도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불멸을 신의 영역에 두지 않고, 매일 보는 산과 나무에서 찾았다. 루벤스의 화려한 신들의 연회보다, 마당의 소나무 한 그루가 더 확실한 영원의 증거일 수 있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무엇을 쓸까. 피닉스의 불꽃일까. 오백 년에 한 번, 재 속에서 부활하는 그 극적인 순간. 아니면 학일까. 해마다 돌아오는, 조용하지만 확실한 존재.
창밖을 본다. 어쩌면 곧 끝나갈 겨울 하늘이 맑다. 어디선가 학이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올해도, 내년에도, 백 년 후에도. 불타지 않아도, 극적이지 않아도, 그저 날아오를 것이다.
그림에 머물다 마음을 씁니다
엄민정, 최수안, 정민이, 이소희, 피오나(임리나) (지은이),
북도슨트,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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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세계의 도시들과 도시문화 석사. 영국에서 10여 년을 지내며 문학과 예술, 여행을 따라 도시를 걸었고 골목과 도시의 일상을 관찰한다. 강화도에서 유럽 헤리티지 채소와 나무들을 기르며 글을 쓰고 문학을 번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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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장생과 피닉스가 그려낸 영원의 서로 다른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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