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무관심이 바꾼 일본의 정치 지형

'조용한 선거' 틈 타 극단적인 지지층 유입으로 일본 보수 자민당 압승

등록 2026.02.10 11:33수정 2026.02.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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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년 전, 기후현 세키가하라는 치열한 전쟁터였다. 1600년 10월, 이곳에서 일본 최대 내전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1598년)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일본 열도는 두 쪽으로 갈라졌다. 도요토미 가문을 추종하는 서군과 이에 맞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다. 15만 명에 달하는 병력은 하루 동안 짧고 굵게 맞붙었다. 결과는 동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승리였다. 도쿠가와 가문은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무너지기 직전까지 260년 동안 권력을 누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도 막부다.

세키가하라고전장 결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이 맞붙었던 세키가하라 결전지를 알리는 기념 표석
▲세키가하라고전장 결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츠나리의 서군이 맞붙었던 세키가하라 결전지를 알리는 기념 표석 임병식

세키가하라 전투는 정치·외교·심리전이 결합한 총력전이었다. 도쿠가와는 전쟁 개시 전에 서군 장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를 포섭, 분열을 유도했다. 고바야카와가 배신하자 서군은 물먹은 흙담처럼 무너졌다. 도쿠가와는 명분에서도 압도했다. 자신을 '권력 탈취자'가 아니라 "도요토미 가문을 지키는 질서 회복 세력"으로 포장했다. 정치적 정당성에 힘입어 동군은 결집, 서군은 동요했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가 이끈 2.8 총선은 세키가하라 내전과 여러 면에서 겹친다. 야권 분열과, '할 말은 하는 지도자'라는 정치적 자산이 그것이다.

일본 총선 기간 중 절반을 현지에서 지냈다. 공업 도시 나고야를 비롯해 역사의 향방을 결정지은 세키가하라, 그리고 도쿄와 인접한 시즈오카 일대를 오가며 총선을 지켜봤다. 대도시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머문 도시들은 총선 열기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출퇴근 선거 유세도, 확성기 소리도, 군중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란한 한국식 선거에 익숙한 내게는 낯설었다. 정치 무관심이 낳은 풍광이었다. 일본 언론은 저조한 투표율은 자민당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조용한 선거'가 정치 지형을 바꿔 놓았다.

선거 벽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후 진지를 알리는 안내판 옆에 붙은 세키가하라 마을에 나붙는 선거 벽보.
▲선거 벽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최후 진지를 알리는 안내판 옆에 붙은 세키가하라 마을에 나붙는 선거 벽보. 임병식

세계문화유산 시라카와고는 관광객으로 가득했고 상점마다 줄이 이어졌다. 이곳에도 선거 벽보는 나붙었다. 그러나 주민들 관심은 선거가 아니라 생업과 관광에 쏠려 있었다. 선거 벽보는 배경에 불과했다. 관광객조차 찾지 않은 세키가하라 들판은 적막했다. 세 시간 넘게 머무는 동안 마주친 선거 관련 장면은 유세 차량 한 대가 전부였다. 나라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시즈오카 현 야이즈 시청 사전 투표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 줄도, 긴장감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일본 총선 투표율은 줄곧 50%대 중반을 벗어나지 못했다. 절반 가까운 유권자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는 정치 무관심은 일상화 된 지 오래다. 이번 중의원 선거 역시 투표율은 55.68%에 그쳤다. 현지 언론은 한겨울 추위를 이유로 들었다. 내가 머문 한낮 기온은 영상 15도까지 치솟았으니 궁색한 해석이었다. 근본 원인은 정치에 대한 기대 상실이다. 이런 와중에 극단적인 지지층은 선거판을 흔들었다. 18~29세까지 젊은 층에서 다카이치 내각 지지율은 90%에 이른다. 이들은 '강하고 풍요롭게'를 내건 다카이치에 열광했다.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와 중국에도 당당한 정치적 이미지에 호응한 것이다.

시라카와고 선거 벽보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라카와고 마을에 나붙은 선거 벽보 앞으로 관광객이 지나고 있다.
▲시라카와고 선거 벽보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라카와고 마을에 나붙은 선거 벽보 앞으로 관광객이 지나고 있다. 임병식

문제는 저조한 투표율은 민의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세력이 투표장으로 향한 결과가 보수 자민당 압승으로 나타났다. 핵심은 이들이 보편적인 정서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칫 우경화 흐름을 가속화하는 압박 기제로 작용할 우려가 크다. 다카이치 총리가 국회를 해산한 건 1월 23일이다. 취임 3개월 만에 국회 해산은 역대 최단이었다. 그는 "과반을 못 얻으면 사임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결국 단독 과반(316석)에 성공했다. 일본유신회를 포함하면 352석이다. 다카이치 내각은 국정 운영에서 주도권을 쥐게 됐다.

다카이치는 '보통 국가'와 헌법 9조 개정 의도를 감추지 않고 있다.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부터 개정할 태세다. 자위대는 사실상 군대지만 제9조로 인해 법적 위상은 애매한 상황이다. 헌법에 명기할 경우 군대 보유를 인정하고, 교전권도 헌법상 권리로 해석될 법적 근거를 갖추게 된다. 다카이치는 선거 유세에서 "자위대원들의 자긍심을 지키고 유능한 조직으로 인정하기 위해 개헌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다. 안보와 국방 분야에서도 가속 페달을 밟을 태세다. 결국 자민당에 표를 몰아준 건 '강한 일본'을 지지한다는 의미다.


우경화 흐름은 한일 관계에 복합적인 신호를 보낸다. 단기적으로는 큰 틀에 변화가 없을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총리는 실리 중심 협력에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다. 이 대통령은 과거는 직시하되 미래지향적 협력은 강화하겠다는 방침을 여러 차례 밝혔다. 미중 갈등과 북핵 위협 등 안보 지형이 요동치는 상항에서 '투트랙' 전략으로 한일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다카이치 총리 역시 중국과 대립 등을 고려할 때, 한국과 협력 기조를 이어갈 것이다. 공급망 재편, 반도체 협력, 북핵 대응 등 양국은 이해가 일치하는 분야가 많다.

그렇다고 마냥 낙관하기 어렵다. 역사 문제와 독도, 야스쿠니 같은 민감한 이슈는 언제든 국내 정치용 카드로 활용될 수 있다. 지지율이 흔들릴 때마다 민족주의는 가장 손쉬운 동원 수단이다. 협력이 갈등으로 바뀌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시끄럽게 싸우는 가운데 정책 방향을 결정하지만, 일본은 조용히 합의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개헌선을 넘는 의석을 확보한 이번 총선 결과는 그런 공식마저 흔들 여지를 안고 있다. 반대 없는 개헌, 토론 없는 군비 확장, 제동 없는 권력 집중은 '조용한 선거'가 불러올 그늘이다.


일본은 역사 속에서 힘이 없을 때는 타협했지만 반대의 경우 군국주의로 내달았다. 압승이 자칫 우경화를 가속화하고 주변국과 불화하는 분기점이 되지 않을지 우려한다. 세키가하라 내전이 에도 막부를 탄생한 분수령이었다면, 이번 총선 역시 또 다른 분기점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함성도 격돌도 없는 '조용한 선거'였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일본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경화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그 속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쓴 임병식씨는 순천향대학교 초빙교수입니다.
#세키가하라 #일본 #총선 #다카이치 #사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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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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