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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집 사장님이 나무 썰매 120개 만든 사연

[인터뷰] 틈틈이 만들어 아이들에게 무료 나눔... 향천사 입구에 핀 정재복씨의 '아이 사랑'

등록 2026.02.10 17:19수정 2026.02.10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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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이면 꽁꽁 어는 식당 근처 개울에서 아이들이 썰매 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정재복 대표가 손수 만든 썰매를 보여주고 있다.
겨울이면 꽁꽁 어는 식당 근처 개울에서 아이들이 썰매 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정재복 대표가 손수 만든 썰매를 보여주고 있다. <무한정보> 황동환

고즈넉한 겨울철 산사 주변에 때 아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충남 예산군 예산읍 금오산 자락에 위치한 향천사가 울긋불긋 아름다운 가을 단풍으로 사람들을 모으더니, 겨울철에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놀이터가 돼 사찰 주위의 온기를 불어 넣고 있다.

향천사로 향하는 길목에서 17년째 한방 오리·닭 백숙 요리를 해온 '향천집 가든' 정재복(64) 대표의 따뜻한 마음이 연출해 낸 풍경이다. 정 대표는 주방에서 솥을 젓는 시간 만큼 분주하게 움직이는 곳이 또 있다. 바로 식당 한 편에 마련된 작은 작업장이다.


올해 예산의 겨울은 유난히 매서운 바람을 몰고 왔지만, 정 대표의 작업장 만큼은 아이들을 향한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곳에서 폐팔레트를 자르고 다듬어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수제 나무 썰매'를 만든다. 그가 썰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아이들을 좋아하는 유별난 성정 때문이다. 정 대표를 지난 2일 만났다.

그는 "총각 때부터 아기들을 그렇게 예뻐했어요. 서울에서 장사할 때도 옆집 아이들만 보면 뭐라도 사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라며 허허 웃었다. 슬하에 남매를 두고 이미 장성해 출가시켰지만, 여전히 길가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는 그에게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활력소다. 그런 그가 지난 2024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향천사 인근 사방댐과 개울가가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는 모습을 보고, 방안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요즘 아이들을 밖으로 불러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기 때문이다. 그가 만드는 썰매는 투박하지만 견고하다.

그가 썰매를 만드는 이유

 틈틈이 만든 썰매가 어느덧 120개가 넘는다.
틈틈이 만든 썰매가 어느덧 120개가 넘는다. <무한정보> 황동환

 틈틈이 만든 썰매가 어느덧 120개가 넘는다. 썰매가 필요한 아이들은 누구나 그냥 가져가면 된다.
틈틈이 만든 썰매가 어느덧 120개가 넘는다. 썰매가 필요한 아이들은 누구나 그냥 가져가면 된다. <무한정보> 황동환

아산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친척에게서 얻어온 폐팔레트가 훌륭한 재료가 된다.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아이들이 앉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면을 고르게 다듬는다. 썰매의 핵심인 날 부분은 날카롭지 않게 손질하면서도 얼음 위에서 매끄럽게 나갈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썰매 한 대를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 남짓. 식당 쉬는 날이나 예약이 없는 틈틈이 시간을 쪼개어 만든 것이 어느덧 120여 개에 달한다. 썰매 뿐만 아니라 얼음을 찍어 나갈 수 있는 꼬챙이까지 세트로 일일이 제작해 창고 한쪽에 쌓아두었다.

처음에는 식당을 찾는 손님들의 자녀에게 빌려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빌려주고 다시 돌려받는 번거로움이 아이들의 즐거움을 방해할까 싶어, 그는 아예 '무료 나눔'으로 마음을 바꿨다.


"가져가서 친구들이랑 실컷 타고, 필요하면 그냥 가져가라고 했어요. 아이들이 기뻐하며 썰매를 들고 가는 뒷모습을 보면 30분 동안 나무를 깎으며 쌓인 피로가 싹 가십니다."

소문은 인근 사과꽃발도르프학교와 예산초등학교 아이들 사이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올해 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나눔을 통해 벌써 20여 명의 아이가 정 대표의 선물을 품에 안고 돌아갔다. 간혹 신나게 놀다 꼬챙이가 부러져 다시 찾아오는 아이들에게는 기꺼이 새것을 내주기도 한다.

사찰 입구 개울이 생각지도 못한 썰매장으로 변하고, 썰매 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정겹고 귀여웠던지, 향천사 스님들이 오며가며 삶은 고구마와 따뜻한 차를 한아름 안고 가져와 나누는 기쁨의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정 씨는 예산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다. 예산초등학교와 예산중학교를 거쳐 천안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마친 그는 서울에서의 객지 생활 끝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7년 전, 공기 맑고 인심 좋은 향천리 자락에 터를 잡고 식당을 시작한 이후로 그는 늘 고향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왔다고 한다.

폐팔레트에 숨을 불어 넣다

비록 그가 공들여 만든 사방댐 썰매장이 올해는 날씨 탓에 넓게 얼지 않아 아쉬움이 남지만, 향천사 입구 응달진 개울가 만큼은 아이들이 놀기에 충분할 만큼 단단히 얼어붙었다.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넘어져도 다칠 염려가 없는 그만의 '비밀 아지트'에서 아이들은 정씨가 선물한 나무 썰매를 타고 겨울의 추억을 쌓아간다.

창고에는 아직 100여 개의 썰매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정씨는 이 썰매들이 다 주인을 찾아가면 또다시 나무를 깎을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한다. 좋은 닭과 좋은 약재로 손님들의 건강을 챙기는 장인의 고집이, 이제는 썰매를 통해 아이들의 동심을 지키는 따뜻한 미담으로 피어나고 있다. 차가운 얼음판 위를 지치며 나가는 나무 썰매 소리가 향천사 계곡에 울려 퍼질 때마다 정 대표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미소가 번진다.

 향천집에서 무료로 받은 썰매로 신나게 노는 아이들.
향천집에서 무료로 받은 썰매로 신나게 노는 아이들. 김미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 에도 실립니다.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썰매, #썰매나눔,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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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지역신문인 예산의 참소리 <무한정보신문>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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