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라이프 오브 파이' 시작 5분 전, 공연 취소 당한 관객입니다

허탈함과 주연 배우 이름 부각된 관련 기사에는 씁쓸함이... 다르게 소통하면 어땠을까

등록 2026.02.11 17:06수정 2026.02.11 17:06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라이프 오브 파이 책과 공연 티켓
▲라이프 오브 파이 책과 공연 티켓 심은혜

지난 10일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 시작 5분 전, 취소 안내 방송이 울렸다. 조명 장비 문제로 공연을 진행할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공연은 그렇게 멈췄다. 그러나 그 순간 더 깊이 새겨진 것은, 그 사실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방식이었다.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는 캐나다 작가 얀 마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소년 '파이'가 벵골 호랑이와 함께 표류하는 이야기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거대한 동물 인형과 정교한 무대 전환,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연출로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수상하며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특히 바다와 폭풍을 표현한 조명은 이 공연의 핵심에 가깝다.


배우 박정민이 주연을 맡은 이번 공연의 예매 경쟁은 치열했다. 나는 지난해 예매 오픈 시간에 맞춰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정시에 접속했는데도 대기자는 이미 천 명이 넘었다.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기를 기다리던 그 시간까지 떠올리면, 그날의 발걸음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접속자 대기인원 기다림의 순간
▲접속자 대기인원 기다림의 순간 심은혜

우리는 저마다의 사정을 정리하고 이 공간에 도착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휴가를 내고 시간을 비운 직장인도 있었을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나는 그 '시간'의 무게를 안다. 일정들을 다시 조율하고, 약속을 옮기고, 하루의 순서를 바꿔야만 가능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날, 그 공간에서 느낀 공기

첫 안내 방송은 또렷하지 않았다. 내가 있던 층에서는 음향이 번져 무슨 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주변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뭐라고 한 거야?" 하고 물었다. 나는 근처 직원에게 상황을 확인했다. 그는 잠시 난처한 표정으로 "아직 정확히 전달받은 게 없습니다. 다시 확인 중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각자 자신의 좌석이 있는 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두 번째 안내가 이어졌고, 그제야 공연 취소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이어 110% 환불이 이뤄질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보상 기준은 명확했다. 그러나 문장은 어딘가 건조했다. 숫자는 또렷했지만, 마음을 건네는 말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있는 현장에서는 그랬다.


각 층에서 출구로 향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계단으로 발걸음이 몰렸다. 구조가 복잡한 공간은 아니었지만, 많은 인원이 동시에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그럴수록 "천천히 이동해달라"는 한 마디 안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취소되는 순간에도 관객은 여전히 그 공간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었다. 그에 대한 배려 역시 소통의 일부였을 것이다. "걸음해 주셨는데 이런 상황이 되어 죄송합니다"라는 한 문장쯤은 더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알려진 대로 '조명 문제'라면 공연을 강행하지 않는 선택은 무책임이 아니라 책임에 가까웠을 것이다. 취소라는 판단 자체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문제가 감지된 시점과 관객에게 설명이 이뤄진 시점 사이에는 어떤 고민이 있었을지는 궁금하다. '점검 중'이라는 짧은 안내라도 조금 더 일찍 전해졌다면 감정의 결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다음 날 마주한 것

함께 온 친구 셋과 눈을 마주쳤다. 각 층에서 로비로 향하는 발걸음은 비교적 차분했다. 물론 분노를 느낀 관객도 있었을 것이다. 항의의 목소리를 낸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느낀 공기는 격앙이라기보다 허탈에 가까웠다.

그 날 밤, 제작사인 <라이프 오브 파이> 프로덕션은 SNS를 통해 "최종 점검 중 원인을 알 수 없는 문제로 조명 기기가 작동하지 않았으며 안전을 고려해 취소를 결정하게 됐다"며 "소중한 시간을 내어 공연장을 찾아주신 관객 여러분께 불편을 드린 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포털사이트에서 마주한 기사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박정민 '라이프 오브 파이', 공연 5분 전 취소돼 원성 폭발"
"박정민은 무슨 죄… '라이프 오브 파이' 개막 5분 전 돌연 취소"

분노한 관객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양한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묶는 순간, 현장의 결은 사라진다. 더 거슬렸던 것은 제목의 구조였다. 대부분의 기사가 '박정민'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면서, 마치 배우 개인이 공연을 취소한 것처럼 읽혔다. 조명 장비 문제는 제작진과 극장 측, 여러 관계자의 기술적 판단 속에서 내려진 결정이었을 텐데, 책임의 화살은 한 사람의 이름을 향해 있었다.

<파이 이야기>(원제 Life of Pi)에서 파이는 묻는다.

"어떤 이야기를 선택할 것인가."

사실은 하나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말할지 선택한다. 공연 취소 역시 다르지 않다. 누구의 이름을 제목 앞에 둘 것인지, 어떤 단어로 감정을 규정할 것인지, 그 선택에 따라 독자가 마주하는 풍경은 달라진다. 공연은 멈췄다. 그러나 사람들의 감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우리는 무엇을 듣지 못했고, 무엇만을 크게 들었을까. 무엇을 어떻게 전하느냐는 결국 신뢰의 문제다. 그리고 그 신뢰는 어떤 이야기를 선택하느냐에서 시작된다. 어제의 발걸음은 시간이 지나 하나의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다만 그 기억을 기록하는 언어 만큼은 조금 더 정확하고 성실했으면 한다. 그것이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과 기사를 읽는 시민 모두를 존중하는 방식일 테니.

한편, <라이프 오브 파이> 프로덕션은 11일 입장문에서 "공연 시간이 임박해 발생한 기기 문제로 객석 입장 지연 및 공연 취소 관련 안내 시점이 늦어진 점 사과 드린다"며 오는 16일, 10일 취소 공연 예매자를 위한 추가 공연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추가 공연 관람을 하지 않는 비관람 관객은 110% 환불하겠다는 공지도 덧붙였다.
#공연취소 #라이프오브파이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다섯 살 터울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마음이 닿는 순간, 글로 남깁니다.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평수 줄여 이사 간 은퇴 부부, 이게 제일 좋다네요 평수 줄여 이사 간 은퇴 부부, 이게 제일 좋다네요
  2. 2 한국 지천에 피는 벚나무, 이런 숨은 사연 있습니다 한국 지천에 피는 벚나무, 이런 숨은 사연 있습니다
  3. 3 에르메스, 구찌...명품 구입에 1억여원 쓴 수상한 한국양계농협 에르메스, 구찌...명품 구입에 1억여원 쓴 수상한 한국양계농협
  4. 4 농촌 사는 청소년들에게 돈을 줬더니, 벌어진 일 농촌 사는 청소년들에게 돈을 줬더니, 벌어진 일
  5. 5 '어머니는 거지입니다'... 일본 왕족의 예상 밖 한국 생활 '어머니는 거지입니다'... 일본 왕족의 예상 밖 한국 생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