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서 두 번째 임순례 감독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백관숙
교수 두 분, 임순례 감독, 통역하는 학생이 무대에 섰다. 영화도 영문 자막이 있었고, 대담도 교수와 학생이 독일어와 한국어로 서로 보완해 가며 통역했지만, 역시나 '전달'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실력 문제가 아닌 통번역의 숙명이다.
나는 임순례 감독이 마이크를 잡을 때면 속으로 '역시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하고 감탄했다. 발성과 전달력이 좋았고, 표현은 솔직하고 명료했다. 감독의 프랑스 유학 체험이 얼마나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 묻는 질문에 "프랑스에서는 당시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중동 영화들을 되려 많이 봐서, 유학이 내 작품에 끼친 영향은 크게 없어요. 나는 굉장히 한국적인 감독"이라고 답변했다.
그날 밤, <세 친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 영화다운 투박함, 30년 시차에도 불구하고 잔인하도록 현실적인 묘사, 후반부 압축과 절제로 마감한 '무소속'의 비극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와이키키 브라더스> 상영에는 전날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들어찼다. 이 영화는 나도 익히 들어본 터라 기대가 컸다. <세 친구>에서 감독은 부러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와이키키>는 음악 영화였고, 코믹한 장면이 많아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학창 시절 밴드부였던 주인공은 여전히 밤무대, 지역 행사, 관광지를 돌며 밴드를 꾸려나간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고, 밴드 멤버들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진상 손님들의 괴롭힘은 극단적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의 표본이다. 이들의 추락과 좌절을 보려니 힘든 장면도 있었지만, <세 친구>와는 달리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음악과 유머 덕분에 나는 곧바로 추스를 수 있었다.
그날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다뤘듯이, 이 영화는 독립 영화와 상업 영화 요소가 섞여 있다. 루저들 삶을 현실감 있게 그리는 동시에, 연출과 편집은 매끄럽고 대중적이었다. 황정민, 박해일, 류승범 배우의 신인 시절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베를린 현지인에게도 친숙한 배우들일 것이다. 대담에서 어느 독일인은 한국 드라마는 재벌, 상류층 얘기가 많은데, 이런 현실 인물 나오는 영화가 훨씬 좋다고도 했다.
평일 오전 10시, 교통 편리한 도심이 아닌 남서부 끄트머리 캠퍼스 극장에 꽉 들어찬 <와이키키 브라더스> 관객을 보고 나는 친구에게 알렸다. "나 내일도 올래. 우리 내일은 좀 미리 와서 좋은 자리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원래 회고전 마지막 작품 <리틀포레스트>는 이미 본 영화이기도 하고 그날은 오후와 저녁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못 올 거라고 친구에게 말해뒀었다. 그런데, 이틀간 극장 체험으로 나는 후끈 달아올랐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오간 정보, 웃음, 공감이 좋았다. 회고전 마지막까지 오롯이 참여하고 싶어졌다. '하루 좀 무리하지, 뭐.' 내 향수병을 달래줄 예쁜 <리틀포레스트> 화면과 소리에 몸을 맡기고 편하게 음미하면 될 것 같았다.

▲회고전 마지막 날, 임순례 감독 백관숙
<리틀포레스트> 관객은 확실히 2030 여성이 많았다. 내 뒤에서 "그 드라마 나도 봤어. 혹시 이건 알아?" 하며 젊은 여학생들의 한국 콘텐츠 수다가 한창이다. 나는 극장에 비치된 '동네 극장 살리기' 연판장에 서명도 하고, 부러 극장 매점에서 음료수를 샀다. 직원에게 장소 제공해 줘서 정말 잘 즐기고 있다고 인사도 건넸다.
극장 중간쯤 자리를 잡고 눈 앞에 펼쳐지는 한국의 사계절, 배추전, 손수 빚은 막걸리, 곱게 단맛 들어가는 곶감을 감상했다. 주인공의 엄마(문소리 역)가 플래시백에서 한두 마디 무심하게 던지는 부드러운 말에도 깊이 위로받았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나쁜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도 돼."
영화 후 대담에서 들었던 "고향, 귀향" 화두가 아직도 맴돈다. 베를린에 정착한 지 이제 20년, 역이민을 알아보다 한국 집값과 노동조건, 사교육비가 겁나 그냥 여기서 살기로 마음먹은 지 10년 차다.
타향살이 중에도 이렇게 영화관에서 '작은 한국'을 만나 멋진 작품, 취향 비슷한 사람들과 교감하며 사는 삶도 괜찮다 싶다. 지금 살고 있는 호수 근처 작은 집에서 '나만의 작은 숲'을 보듬는 것도 괜찮다 싶다. 설날이면 아이가 다니는 한글 학교 명절 행사에 만족하며 사는 것도, 계절을 느끼며 사는 것도, 저녁 한 끼는 가족이 다 모여 먹으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일상도 괜찮다 싶다.
<세 친구>는 강렬했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페이소스 넘쳤고 <리틀포레스트>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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