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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를린 이민 20년차가 '임순례 감독 회고전'에서 받은 위안

    매일 한 편씩 영화 관람... 타향 살이도, 향수병도, 지금 이런 삶도 괜찮다 싶네요

    등록 2026.02.16 16:25수정 2026.02.1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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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임순례 감독 회고전 포스터 2026년 2월 자유대학 한국학과 주관 회고전
    ▲베를린 임순례 감독 회고전 포스터 2026년 2월 자유대학 한국학과 주관 회고전 백관숙

    매년 2월, 베를린 영화제 기간에는 여러 부대 행사와 늘어난 관광객으로 분위기가 들뜬다. 집값은 치솟았지만, 베를린 문화 향유 비용은 여전히 저렴하다. 도시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영화 행사가 현지인, 관광객 모두에겐 반갑다.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과에서 2월 11~13일, 임순례 감독 회고전을 열었고 나는 아침 10시마다 영화를 보고 감독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장편 데뷔작인 독립 영화 <세 친구>(1996), 마니아층을 낳은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년), 흥행작 <리틀 포레스트>(2018)다.


    자유대 캠퍼스 인근 영화관에 도착했다. '한국 영화 페스티벌' 문구가 반갑다.

    베를린 자유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한 영화관 카피톨 달렘 남서부 달렘에 위치한 영화관 전경
    ▲베를린 자유대학교 캠퍼스에 위치한 영화관 카피톨 달렘 남서부 달렘에 위치한 영화관 전경 백관숙

    첫날 <세 친구>를 보는데, 30년 전 한국 독립 영화를 극장에서 현지인과 섞여 보는 기분이 묘했다. 이 영화에서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은 남자 동창 셋이 주인공이다. '무소속'은 만화를 그리고, '삼겹'은 알바를 전전하다 비디오 대여점에서 일하고, '섬세'는 부모 몰래 미용 학원에 다닌다.

    대학 진학이라는 주류 경로를 이탈한 주변인의 일상은 힘겹다. '무소속'은 공모전에 낸 창작물을 갈취당하고, '삼겹'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고통스럽게 과식을 해대며 몸을 해치고, 몰래 어머니 미용실에서 여자 가발을 쓰고 있던 '섬세'는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무소속'이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사소한 이유로 선생에게 끔찍하게 맞는 대목이다. 학교와 군대의 폭력으로 결국 '무소속'은 청력을 잃는다. 영화의 엔딩은 듣지 못하게 된 주인공이 어두운 시장 천막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다. 절제된 이 엔딩에 내 가슴은 저렸고, 관객들은 박수로 응답했다.

    곧이어 감독과의 대화가 시작됐다. 초반에 쭈뼛하던 관객들은 점점 질문이 많아졌고, 다양한 감상평과 감독의 대답을 듣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임순례 감독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오른쪽에서 두 번째 임순례 감독 영화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백관숙

    교수 두 분, 임순례 감독, 통역하는 학생이 무대에 섰다. 영화도 영문 자막이 있었고, 대담도 교수와 학생이 독일어와 한국어로 서로 보완해 가며 통역했지만, 역시나 '전달' 과정에서 의미가 퇴색된다. 실력 문제가 아닌 통번역의 숙명이다.

    나는 임순례 감독이 마이크를 잡을 때면 속으로 '역시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하고 감탄했다. 발성과 전달력이 좋았고, 표현은 솔직하고 명료했다. 감독의 프랑스 유학 체험이 얼마나 작품에 영향을 끼쳤는지 묻는 질문에 "프랑스에서는 당시 한국에서 접하기 어려운 아프리카, 중동 영화들을 되려 많이 봐서, 유학이 내 작품에 끼친 영향은 크게 없어요. 나는 굉장히 한국적인 감독"이라고 답변했다.


    그날 밤, <세 친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독립 영화다운 투박함, 30년 시차에도 불구하고 잔인하도록 현실적인 묘사, 후반부 압축과 절제로 마감한 '무소속'의 비극이 너무나 강렬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와이키키 브라더스> 상영에는 전날보다 훨씬 많은 관객이 들어찼다. 이 영화는 나도 익히 들어본 터라 기대가 컸다. <세 친구>에서 감독은 부러 음악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와이키키>는 음악 영화였고, 코믹한 장면이 많아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학창 시절 밴드부였던 주인공은 여전히 밤무대, 지역 행사, 관광지를 돌며 밴드를 꾸려나간다. 경제 상황은 좋지 않고, 밴드 멤버들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가고, 진상 손님들의 괴롭힘은 극단적이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의 표본이다. 이들의 추락과 좌절을 보려니 힘든 장면도 있었지만, <세 친구>와는 달리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음악과 유머 덕분에 나는 곧바로 추스를 수 있었다.

    그날 감독과의 대화에서도 다뤘듯이, 이 영화는 독립 영화와 상업 영화 요소가 섞여 있다. 루저들 삶을 현실감 있게 그리는 동시에, 연출과 편집은 매끄럽고 대중적이었다. 황정민, 박해일, 류승범 배우의 신인 시절을 보는 즐거움도 컸다. 베를린 현지인에게도 친숙한 배우들일 것이다. 대담에서 어느 독일인은 한국 드라마는 재벌, 상류층 얘기가 많은데, 이런 현실 인물 나오는 영화가 훨씬 좋다고도 했다.

    평일 오전 10시, 교통 편리한 도심이 아닌 남서부 끄트머리 캠퍼스 극장에 꽉 들어찬 <와이키키 브라더스> 관객을 보고 나는 친구에게 알렸다. "나 내일도 올래. 우리 내일은 좀 미리 와서 좋은 자리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원래 회고전 마지막 작품 <리틀포레스트>는 이미 본 영화이기도 하고 그날은 오후와 저녁에 또 다른 일정이 있어서 못 올 거라고 친구에게 말해뒀었다. 그런데, 이틀간 극장 체험으로 나는 후끈 달아올랐다! 감독과의 대화에서 오간 정보, 웃음, 공감이 좋았다. 회고전 마지막까지 오롯이 참여하고 싶어졌다. '하루 좀 무리하지, 뭐.' 내 향수병을 달래줄 예쁜 <리틀포레스트> 화면과 소리에 몸을 맡기고 편하게 음미하면 될 것 같았다.

    회고전 마지막 날, 임순례 감독
    ▲회고전 마지막 날, 임순례 감독 백관숙

    <리틀포레스트> 관객은 확실히 2030 여성이 많았다. 내 뒤에서 "그 드라마 나도 봤어. 혹시 이건 알아?" 하며 젊은 여학생들의 한국 콘텐츠 수다가 한창이다. 나는 극장에 비치된 '동네 극장 살리기' 연판장에 서명도 하고, 부러 극장 매점에서 음료수를 샀다. 직원에게 장소 제공해 줘서 정말 잘 즐기고 있다고 인사도 건넸다.

    극장 중간쯤 자리를 잡고 눈 앞에 펼쳐지는 한국의 사계절, 배추전, 손수 빚은 막걸리, 곱게 단맛 들어가는 곶감을 감상했다. 주인공의 엄마(문소리 역)가 플래시백에서 한두 마디 무심하게 던지는 부드러운 말에도 깊이 위로받았다.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해," "나쁜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아도 돼."

    영화 후 대담에서 들었던 "고향, 귀향" 화두가 아직도 맴돈다. 베를린에 정착한 지 이제 20년, 역이민을 알아보다 한국 집값과 노동조건, 사교육비가 겁나 그냥 여기서 살기로 마음먹은 지 10년 차다.

    타향살이 중에도 이렇게 영화관에서 '작은 한국'을 만나 멋진 작품, 취향 비슷한 사람들과 교감하며 사는 삶도 괜찮다 싶다. 지금 살고 있는 호수 근처 작은 집에서 '나만의 작은 숲'을 보듬는 것도 괜찮다 싶다. 설날이면 아이가 다니는 한글 학교 명절 행사에 만족하며 사는 것도, 계절을 느끼며 사는 것도, 저녁 한 끼는 가족이 다 모여 먹으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일상도 괜찮다 싶다.

    <세 친구>는 강렬했고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페이소스 넘쳤고 <리틀포레스트>는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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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임순례회고전 #베를린영화 #베를린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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