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담회에서는 6개의 원으로 나누어 각자의 삶에서 '용기'를 낸 경험을 이야기했다.
열매
피해자로 남지 않는 열매의 서사
누군가를 피해자로 명명할 경우 개인이 가진 다양한 정체성은 가려지고 사회는 그를 전형적인 피해자상에 입각해 바라본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에게는 더 엄격한 '피해자다움'이 요구된다. 피해자라는 관념은 피해를 입은 그 사건만으로 당사자를 전부 설명할 수 있다고 여기고,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사자를 과거 피해에 종속된 사람으로 간주하게 만든다.
피해자를 피상적으로 이해할 때 피해자 집단 또한 동질적인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 그러나 열매만 보아도 이는 커다란 착각이다. 열매 구성원이 5·18에서 입은 피해 종류는 각기 다르며 이후 이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도 상이하다. 개인의 성향과 가족, 주변 환경과 사회적 관계 등의 조건 속에서 이들이 5·18의 상처와 맺고 있는 관계 또한 제각각이다.
6개 모듬으로 나누어 진행한 대화에서 이 차이가 드러났다. 대화 주제는 살아오면서 자신이 냈던 가장 큰 용기, 혹은 앞으로 내고 싶은 용기였다. 열매 대다수는 5·18과 관련된 경험을 회상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달랐다.
항쟁 마지막 날 도청에서 살기 위해 냈던 용기, 자신을 5·18에서 가장 억울한 피해자로 생각했던 인식을 바꾸는 용기, 가족에게도 말 못 했던 5·18 피해를 조사위에 말했던 용기가 이야기됐다. 성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차별적 관념에 저항하고 고통을 극복하고자 했던 용기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 임신했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지만 아이를 낳고 보는데 굉장히 새로운 감정이 막 솟구치더라고요. (...) 어떻게 해야 될까, 막 그냥 어떻게 살아야 될까, 이런 생각이 굉장히 강하게 치고 올라오면서, 뭔가 내 자신이 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내 마음 속의 어떤 그 분열이 좀 일어나면서 나에 대한 정체성을 좀 찾아야 되겠다 해서. (...) 그래서 특히 우리 성폭력에 대한 제 마음속에 확답을 이미 저는 일찍 내렸었어요. 이거는 내 잘못이 아니다. 이거는 내 잘못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걸로 해서 주저앉을 필요가 없다. 저는 그 인식을 명백하게 그때 했어요."
열매 연대자의 응답은 '우리'의 자긍심이 됐다
그러나 이러한 용기는 열매에게 양가적이었다. 용기를 내서 도청을 탈출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지고 살았다. 피해자로만 남지 않겠다는 용기가 5·18의 트라우마에 고통받는 다른 이에게는 상처가 될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움도 있었다. 열매가 껴안은 마음의 짐에 연대자들은 공감을 표하면서도 그 용기의 의미를 부여하며 지지를 보냈다.
"그러니까 당신의 한이 아니라 정말 내가 목격했던 그 죽어간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끝까지 살아오시고 이걸 계속 간직해 오신 선생님의 그 삶 자체가 용기인 것 같아요."
"선생님들의 (...) 이 지독한 어떤 힘이 이 광주에서 머물지 않고 수많은 여성들, 이렇게 많은 수많은 피해자 여성분들이 많은데 그분들한테까지 확장된 운동이 될 수 있으리라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밀한 고백과 사려 깊은 응답, 이날 대화의 원칙은 열매와 연대자 모두에게 적용됐다. 연대자 또한 자신이 용기 냈던 순간을 이야기했다. 개인이 겪은 차별이나 억압, 혹은 사적인 좌절의 경험을 집단으로 나누면서 참가자들은 보편적으로 작동하는 폭력의 구조가 있음을 실감했다. 동시에 만연한 폭력에 저항하고 상처를 극복한 서사들은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개척해 온 주체임을 깨닫게 했다. 참가자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한 '우리'에 자긍심을 느꼈다. '우리'는 변화를 만들어낼 힘을 내재하고 있었다.

▲ 2024년 열매가 처음 만나 이루었던 작은 동심원. 이때까지만 해도 열매의 동심원이 커지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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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12월 12일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3차 집담회는 한층 커진 동심원에서 치유의 퍼포먼스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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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책임을 따지는 일, 그 이상의 질문을 위해
집담회에 모인 이들은 한국 사회에 반복되는 젠더 폭력의 고리를 끊고 싶다는 소망을 공유했다. 과거사 피해자 중에는 젠더 폭력을 밝히지 못한 이들이 많다. 일례로 제주4·3사건은 성폭력에 대한 수많은 목격 증언이 있지만 공식적인 당사자 증언은 한 건도 없었다.
폭력적 진압이나 학살, 연행·구금 및 사찰의 과정에서의 성폭력과 성고문, 대살(代殺, 아내 등 가족을 대신 살해함)에 이르기까지 젠더 폭력이 행해졌지만 국가조사기관에서조차 젠더 폭력에 초점을 맞춘 제대로된 조사가 이루어진 적 없기 때문이다. 2022년 윤미향 의원이 젠더기반폭력에 대한 진실규명 조항을 포함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해당 법안은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 폐기되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열매'는 과거사 젠더폭력으로 진상규명 결정을 받은 최초의 선례다. 또한 피해 당사자가 증언자로 거듭나고 법적 투쟁과 치유 모임을 지속하는 공동체이다. 과거사 젠더폭력 피해자가 정의회복과 치유를 상상할 수 없는 조건에서 열매는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부마민주항쟁의 주역이자 성폭력 피해자인 최갑순이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열매 모임을 찾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3차 집담회는 동일한 의제와 가치를 지향한다면 서로 다른 이들도 '열매'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 자리였다. 확장된 열매는 자조모임의 성격에서 세상을 바꾸는 운동 그자체가 되어야 했다. 5·18 성폭력 피해자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유사한 과거사 젠더폭력 피해자의 정의와 치유를 대변하는 조직이 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열매가 앞장설 수 있다는 믿음이 커다란 동심원을 하나로 연결되게 만들었다. 이날 자리에서 비영리 민간단체로의 창립을 예비하는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우리는 5·18 성폭력에 대한 국가 책임을 따지는 것만을 위해 소송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국가폭력이 피해자와 사회에 남긴 상처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치유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이 길에 나란히 섰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직면하고 책임을 나눠지는 용기로 정의를 세웁니다. 우리는 정의가 법과 제도 속에, 또한 우리의 삶과 관계 속에 머물도록 할 것입니다.
2026년 2월 26일, 우리는 '자조모임'에서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여는 열매'로 조직을 전환합니다. 이 길에서 마주하게 될 걸림돌들을 하나하나 치유와 회복의 디딤돌로 바꿔낼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모두는 '열매'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빛이며, 길입니다.

▲ 5·18 열매 창립 발기인 및 후원 회원 모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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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성폭력 치유와 회복을 위한 단체 '열매'의 연구 활동가입니다. 국가폭력과 젠더폭력이 겹쳐진 곳에서 들려지지 못한 여성 증언을 청취하고 당사자의 곁에서 지연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부하고 행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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