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아이의 문장으로 꽉 채운 설 연휴 사흘

무주 자연휴양림, 거창 수승대, 예산 상설시장에 가다

등록 2026.02.19 14:25수정 2026.02.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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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를 맞아 가족과 함께 무주 덕유산으로 향했다. 겨울 캠핑은 쉬어가기로 했으나, 손자의 간절한 바람에 따라 장비 없는 글램핑으로 행선지를 정했다. 무거운 짐 대신 가벼운 먹거리만 챙기니 여행길이 한결 여유롭다.

첫째 날, 가문비나무 숲길에 흐르는 고요


첫 여정은 무주 자연휴양림의 독일가문비나무 숲길이었다. 산불 조심 기간이라 등산로는 통제되었으나, 대신 열린 산책로를 따라 산의 속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가문비나무들이 줄지어 선 풍경은 이국적이면서도 단단했다.

층층이 내려앉은 가지들은 화려한 장식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한겨울 추위를 견뎌낸 침엽수의 짙은 잎빛은 기세가 당당했다. 바닥에 떨어진 작은 솔방울을 발견한 로리가 물었다.

"할머니, 이거 아기 솔방울이에요?"
"왜 아기라고 생각해?"
"나처럼 작으니까요."

아이 손에 꼭 맞는 길쭉하고 가벼운 솔방울은 그날부터 로리의 소중한 길동무가 되었다. 계곡으로 내려가니 투명한 얼음 아래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음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낮은 물소리에 발걸음이 멈췄다.

"우와! 물이 숨어서 지나가요! 안 들키려고 얼음 밑으로 숨었나 봐요."


아이의 맑은 상상이 숲의 고요와 어우러졌다. 딱따구리의 경쾌한 소리가 환영의 인사를 대신하자
로리는 딱다구리를 찾느라 눈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걷고, 뛰고, 또 걸으며 작은 소리들까지 담아내는 숲의 여정이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밤이 되니 하늘엔 유난히 선명한 별들이 내려앉았다. 별들이 원래 이렇게 많았다고? 진짜 오랜만에 새삼스러운 생각을 하게도 된다. 무주는 그렇게 넉넉한 품으로 우리 가족을 안아주었다.


무주 자연휴양림 숲과 계곡의 소리만으로도 행복하다.
▲무주 자연휴양림 숲과 계곡의 소리만으로도 행복하다. 신혜솔

둘째 날, 수승대 출렁다리를 건너는 용기

다음 날, 덕유산 자락을 따라 거창으로 발길을 옮겼다. 무주 무풍면에서 빼재터널만 지나면 곧바로 경남 거창이다.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고장이 바뀌는 풍경이 사뭇 흥미롭다. 거창 신씨의 뿌리를 둔 이에게 이곳은 낯설지 않은 고향 같은 곳이다. 시인 신달자, 신중신 선생 등 문중의 어른들을 떠올리면 피붙이의 고장을 지나는 마음이 한결 느슨해진다.

이번 여정에서는 무주와 인접한 수승대(搜勝臺)를 찾았다. 수승대는 퇴계 이황 선생이 그 빼어난 경치에 반해 '근심을 잊게 하는 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을 만큼 유서 깊은 명승지다. 그 계곡 위로 몇 년 전 들어선 출렁다리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거 떨어지면 어떡해요?" 겁을 내던 것도 잠시, 로리는 "내가 앞장설게요!"라며 씩씩하게 발을 내디뎠다. 다리가 출렁일 때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계곡에 퍼졌다. "와! 놀이기구네!"라며 달려가는 아이와 달리, 엄마는 입구에서 발을 떼지 못한 채 손을 흔들었다. 아찔한 높이에도 로리는 두 번이나 다리를 왕복하며 사과처럼 발그레해진 얼굴로 외쳤다.

"나 용감하지?"

지나가던 이들도 "아기 최고!"라며 박수를 보냈다. 아이의 어깨에 기분 좋은 자신감이 실렸다. 다시 아래로 내려와 수승대 계곡길로 향했다. 바윗돌이 많고 넓은 계곡이다. 계곡의 이쪽과 저쪽을 건너는 낮은 현수교 앞에 서자, 조금 전까지 질주하던 아이가 발걸음을 늦췄다.

"할머니, 여긴 천천히 가야 돼요. 물이 우리를 보고 있어요."

거창의 수승대는 그렇게 역동적인 흔들림과 정적인 고요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수승대 출렁다리를 왕복 두 번 건너는 로리와 아빠.
수승대 출렁다리를 왕복 두 번 건너는 로리와 아빠. 신혜솔

세 번째 날, 예산 시장의 활기 속에 머물다

연휴의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예산에 들렀다. 예당호의 드넓은 물빛이 먼저 반겼다. 1960년대 조성된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수인 예당호는 그 넓이가 마치 바다를 마주한 듯 장쾌했다. 이곳의 출렁다리는 거창과 달리 낮고 단단해 물 위를 걷는 평온함을 선사했다.

로리는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와, 바다다! 할머니, 얼음 좀 보세요!" 호수 가장자리에 얇게 얼어붙은 얼음과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아이의 눈에 바다로 비쳤던 모양이다. 거창에서 산의 높이를 건넜다면, 예산에서는 호수의 넓이를 건너온 셈이다.

 예당호와 현수교
예당호와 현수교 신혜솔

여행의 마무리는 예산 상설시장에서 맞이했다. 최근 전통시장의 새로운 모델로 주목받는 이곳은 단순한 장보기 공간을 넘어 세대와 세대가 어우러지는 문화의 장이었다. 광장 중앙 테이블에 앉아 각자 원하는 음식을 하나씩 골라왔다. 지글거리는 삼겹살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 매콤한 떡볶이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고기 집게를 탐내는 로리를 아빠가 만류하자 아이가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나는 아빠가 잘 하는지 보고 있을게요, 내가 감독이에요!"

시장 가득 퍼지는 사람 냄새와 장터의 활기는 여행의 피로를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무주 숲에서는 솔방울이 친구가 되었고, 수승대에서는 용감한 도전자가 되었으며, 예산 시장에서는 꼬마 감독이 된 아이 덕분에 모든 순간이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돌아오는 봄, 어디로 갈지 고민이라면 꽃구경도 좋지만 조용한 숲과 흔들리는 다리, 그리고 사람의 온기가 살아있는 시장을 권하고 싶다. 아, 수승대 출렁다리에서 로리의 '최연소 기록'이 누군가에 의해 깨질지도 모를 일이다.

 예산 상설시장에서 맛있는 시간
예산 상설시장에서 맛있는 시간 신혜솔
#설연휴 #무주 #거창 #예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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