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자다르의 햇살 아래 개업한 '베란다 미용실'. 숙소 베란다에서 아내가 나의 장발을 잘라주고 있다. 어린 시절, 마당에 앉아 부모님의 손길에 머리를 맡기던 그 시절의 향수를 담아 흑백으로 기록했다. 서투른 가위질이었지만 그 어느 전문가의 손길보다 다정했던 시간이었다.
김봉석
떨리는 마음으로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그곳에는 아드리아해의 테리우스는 온데간데없고, 흡사 90년대 '알까기' 시절의 개그맨 최양락씨를 연상케 하는 중학생 단발머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정교한 층이나 세련된 질감 따위는 없는, 아주 정직하고 뭉툭한 단발이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1초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대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내도 본인의 작품에 당황했는지 배를 잡고 구르기 시작했다. 화가 날 법도 한 상황이었지만, 거울 속의 촌스러운 내 모습이 너무나도 정겨워 나 역시 눈물이 날 때까지 웃었다.
이 단발머리는 20년 동안 '세련된 짧은 머리'를 유지하느라 애썼던 나에 대한 해학적인 보상 같았다. 비싼 미용실 의자에서 "5cm만 남겨주세요"라고 예민하게 주문하던 그 깐깐한 직장인 남성은 자다르의 어느 베란다에서 아내의 가위질 몇 번에 완전히 소멸해버린 것이다.
머리카락과 함께 잘려 나간 것들
지금 나는 자다르의 거리를 '최양락 단발'을 하고 씩씩하게 걷는다. 바람이 불면 예전처럼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지만, 이제는 훨씬 가볍고 경쾌하다.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도, 전문가의 손길로 다듬어진 완벽한 각도도 필요 없는 삶. 아내가 정성껏 잘라준 이 머리카락은 우리 부부가 해외 살이에서 서로를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가 되었다.
장기 해외 살이를 하다 보면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된다. 한국의 편리한 인프라, 익숙한 미용실, 단골 식당... 하지만 포기한 자리에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낯선 환경에서의 용기, 예기치 못한 상황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여유, 그리고 서로의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다정한 시간이다.
나의 헤어스타일은 여전히 진화 중이다. 다음번엔 아내가 조금 더 실력을 발휘해 줄지, 아니면 아예 삭발을 권유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머리카락이 길어지고 짧아지는 그 리듬 속에 우리 부부의 해외 생활도 더욱 능숙하고 단단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빗는다. 비록 세련되지는 않았지만, 이 머리카락에는 자다르의 설날 아침 우리가 함께 나눈 그 찬란한 웃음이 묻어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 단발머리는 내 인생 최고의 헤어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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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0년간의 안정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부부가 함께 은퇴 후 시작한 새로운 여정. 안정된 삶 대신 꿈을 선택한 40대 파이어족의 좌충우돌 '은퇴 후 삶'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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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30분 걸려 자른 머리, 눈물이 나도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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