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어로 인사한 "또 만나요" 노인정에서 나눈 마음

멀리서 온 딸 친구 외할머니와 함께 즐긴 놀이들... 함께 놀며 '환대'를 나눈 하루

등록 2026.02.23 16:30수정 2026.02.2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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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건너 앞집에는 다문화 가정이 있다. 베트남 여성과 한국 남성이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는 집이다. 이곳은 우리 첫째 딸 친구의 가족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설이 하루 지난 18일 수요일 오후, 시장에 가려고 집을 나서던 길에 딸의 친구와 그의 외할머니를 만났다. 설날과 아이들 방학을 맞아 베트남에서 며칠간 머무르기 위해 한국에 오셨다고 했다. 길가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며 명절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물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나는 시장으로 향했다.


시장에서 장을 보던 중, 지난해 12월 말 문풍지 봉사 활동을 계기로 알게 된 한 가족을 만났다(관련 기사 : 말문이 턱, 겨울밤 '산타아줌마'가 된 사연). 할머니와 여섯 살 손녀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어디를 가시느냐고 묻자, 명절이라 동네 노인정에서 주민들이 모여 여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말을 들으니 조금 전 길에서 만났던 딸 친구와 그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혹시 함께 가도 괜찮겠느냐고 조심스레 여쭈었더니, 얼른 모시고 오라고 하셨다.

장을 본 물건을 집에 내려놓고 딸 친구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의사를 물었다. 할머니께 여쭤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잠시 뒤, 할머니가 주저하고 계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딸과 함께 집을 직접 찾아가 휴대전화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켜고 말을 주고받았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 혹시 다른 분들이 불편해하지는 않을지, 초대 받지도 않았는데 괜히 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고 계셨다. 가보고 싶은 마음은 있어 보였지만, 혹시 누군가에게 불편을 줄까 봐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는 우리 동네 분들이 다들 좋은 분들이라며 안심을 시켜드렸다. 그제야 할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함께 노인정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모포를 깔아놓고 공기놀이를 했다.
모포를 깔아놓고 공기놀이를 했다. 유수영

나는 전통놀이인 공기를 챙겼다. 노인정에 도착하니 할머니들이 모여 윷놀이와 화투놀이를 하고 계셨다. 모시고 간 할머니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노인정에 계시던 할머니들은 잘 왔다며 악수를 건넸다.

"이이가 어데 나라라고?"
"베트남에서 오셨어요."


할머니들은 알고 있는 외국어를 모두 꺼내 인사를 건넸다. 노인정 안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10여 분간 이어진 인사가 끝나고 나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한국 놀이가 처음인 할머니에게 화투는 복잡해 보였다. 대신 공기놀이와 윷놀이를 함께 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제법 공기놀이를 잘했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바닥에 떨어진 공기를 능숙하게 집어 올리고, 손등에 올려 꺾기 단계도 자연스럽게 넘겼다. 나는 공기를 잡은 지 수십 년이 지났는지라 손에서 공기가 굴러 떨어지기 일쑤였다. 헛손질도 잦았다. 딸 친구의 할머니 역시 처음 해보는 놀이에 실수를 거듭했지만, 아이와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공기놀이가 이어지자 화투를 치던 할머니들이 하나둘 자리를 옮겨와 옆에 앉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과 몸짓을 했고, 공기를 가져가 직접 손 위에 올려보며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서로 공기를 해보겠다며 웃음 섞인 실랑이도 벌어졌다. 어릴 때는 얼마나 잘했는지 모른다며 추억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규칙을 이해하는지 보다,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일보다, 함께 웃고 어울리는 일이 더 중요해 보였다.

 AI 로 만든 윷놀이 사진. (몹시도 진지했던 윷놀이 도중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다.)
AI 로 만든 윷놀이 사진. (몹시도 진지했던 윷놀이 도중 미처 사진을 찍지 못했다.) 유수영

윷놀이가 시작되자 분위기는 더 활기를 띠었다. 윷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할머니들은 몸을 앞으로 숙였고, 결과가 나오면 박수를 쳤다. 딸 친구의 할머니도 그 흐름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있었다. 도개걸윷모 중에서 '걸'이 나오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던져진 윷가락 하나가 반쯤 걸쳐진 채 뒤집힌 건지 아닌지 애매하게 던져 졌다. 그게 '걸'인지 '개'인지를 두고 실랑이가 오갔다. 그 와중에 딸 친구의 할머니도 그 틈에 끼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걸"을 외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타국에서 잠시 머물다 다시 돌아가야 하는 외할머니, 혼자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까지. 각자의 삶은 다르지만, 놀이 앞에서는 모두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노인정을 나설 무렵, 아쉬움이 묻어나는 노인정 할머니들은 "또 보자"는 말이 베트남어로 뭔지 물어오셨다. 나는 얼른 번역 앱을 열어 확인했다.

"Hẹn gặp lại. '핸 갑 라이'네요."
"행가비?"
"핸! 갑! 라! 이!"
"그래그래. 행가비! 행가비!"

놀이는 세대와 세대를 잇고, 국가와 국가 사이를 잇는다. 같은 공간에 앉아 같은 놀이를 하고 같은 웃음을 나누는 일은 복잡한 규칙이나 설명보다 먼저 사람을 연결한다. 그날 노인정에서 나는 함께 노는 일이 누군가를 가장 자연스럽게 환대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다문화 #공기놀이 #윷놀이 #설날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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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나가는 인물과 장소, 고단한 날들에서 흘러나온 진짜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사소해 보이는 순간들이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 위로가 되길 바라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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