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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에 옷 젖듯, 교제 폭력은 그렇게 시작된다

[살아남은 여자들 ②] 일상화된 통제와 강압, 피해자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폭력의 시작

등록 2026.03.02 16:05수정 2026.03.02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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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정부가 교제폭력 대응을 국정과제로 지정하면서 논의가 다시 불붙었다. 언론은 주로 굵직한 교제 살인 사건을 재조명하지만, 죽은 피해자는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경험만이 문제를 알리고 제도를 바꿀 수 있다. 신고부터 회복까지, 그들이 마주한 장벽은 무엇이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제도를 통해 개선할 수 있을까? 실제 사례를 통해 그 가능성을 모색해봤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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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생성 이미지 오마이뉴스

교제폭력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흉기와 살해 위기가 등장하는 끔찍한 사건부터 떠올린다. 1편에서 만난 박수진(가명)씨는 세 번의 신고 끝에 겨우 전 연인에게서 벗어났다(관련 기사 :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교제폭력 3번의 신고,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https://omn.kr/2gr4r).

하지만 일상화된 폭력 앞에서 신고의 문턱도 넘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이 기사는 '신고 이전'의 시간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당사자조차 '폭력인지 헷갈리는' 단계에 머물러 있는 교제폭력에 주목했다.

일상에 스며든 교제폭력

최민영(20대, 가명)씨가 처음 '싸함'을 느낀 순간은 연애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동아리 회식 뒤, 선배의 원룸에 둘만 남았을 때였다. 술에 취해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갑자기 민영씨의 몸에 키스마크를 남겼다. 민영씨는 분명히 저항했지만 술기운과 체격 차이 앞에서 버티기 어려웠고,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다'는 감각과 함께 어색하게 봉인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연인이 됐다.

연애를 시작한 뒤에도 그 '이상함'은 다른 모습으로 계속 드러났다. 민영씨가 원치 않는 스킨십에 거절 의사를 밝혀도 남자친구는 "연인이면 당연하다"는 식으로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성관계 요구, 민감한 부위를 꼬집거나 잡아당기는 행동이 반복됐다.

민영씨는 불편했지만 동시에 그가 평소에 보여주던 헌신적인 태도가 떠올랐다. "평소에는 잘해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죄책감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그는 이 관계를 '폭력'이라고 단정 짓지 못했다.

윤지수(20대, 가명)씨가 겪은 폭력은 더 느리고 조용하게 스며들었다. 연애 초반, 그는 겉으로 보기엔 '매너 좋은 남자친구'였다.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도 뭐라 하지 않았고 "맛있는 거 먹으면 네가 생각난다"는 말로 애정을 표현했다. 지수씨는 이 관계가 건강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어디 갈 때마다 알려 줘"라는 요구는 어느 순간부터 통제의 방식이 됐다.


규칙은 한 번 시작되자 끝없이 늘어났다. 오후 10시 통금, 동아리 활동 금지, 술집과 대학가 출입 제한, 옷차림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요구가 일상처럼 따라붙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바로 '헤어지자'는 말이 돌아왔고, 지수씨가 헤어지자고 하면 그는 죽겠다고 협박했다.

지수씨는 머리로는 이런 행동이 가스라이팅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맞춰줘야 관계가 유지된다"는 혼란에 사로잡혔다. 그는 "이게 사랑인지 폭력인지 헷갈리는 상태였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가해자의 폭력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명백한 위험'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민영씨에게는 원치 않는 키스마크와 반복되는 강압적 스킨십이, 지수씨에게는 '보고만 해 달라'는 말에서 시작된 작은 규칙이 첫 신호였다.

은은한 폭력이 쌓이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스스로를 '교제폭력 피해자'라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좋아하니까 저러겠지", "나도 잘못한 게 있으니까 맞춰야지"라는 자기 합리화가 폭력을 일상에 더 오래, 더 깊게 자리 잡게 했다.

교제폭력은 뉴스에 나오는 극단적인 사건 이전에 일상적인 얼굴로 먼저 다가온다. 애정을 내세운 통제, '장난'으로 포장된 스킨십, 죄책감과 사랑을 동시에 자극하는 말들이 그 시작이다. 문제는 이 단계에서 피해자 스스로 "이건 폭력이다"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가해자는 애인이고 관계는 계속되고 있으며, "내가 피해자다"라고 주변에 말하는 일은 곧 '내 연인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 큰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이른 시점'이 바로 이때다. 그러나 정작 이 순간에는 그 누구도, 심지어 피해자 본인조차 상황을 폭력으로 보지 못한다.

이 책임은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한 개인의 탓이 아니다. 교제폭력의 일상성이 지워진 사회는 사법부·수사기관·언론이 함께 만들어온 결과에 가깝다. 법원은 '연인 관계였다'는 이유로 폭력을 축소하거나 집행유예를 선고해 왔고, 경찰은 신고를 "연인 간 다툼" 정도로 취급하며 돌려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교제살인이나 극단적인 스토킹 사건이 터졌을 때만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보도가 쏟아지는 현실 역시 교제폭력을 '수위 높은 특수 범죄'로만 남겨 둔다.

이 구조 속에서 교제폭력 피해는 '가해 강도'로만 평가된다. 심각하게 다쳤거나 극단적인 상황까지 내몰린 사람만 '진짜 피해자'의 자격을 얻고, 그 밖의 피해는 주변부로 쉽게 밀려난다.

단순히 교제폭력을 "더 강하게 처벌하자"는 요구만으로는 부족하다. 피해자가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감수성, '폭력의 강도' 대신 관계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시선, 신고 이전 단계에서 일상의 폭력을 포착하고 제동을 거는 장치가 함께 마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제폭력은 계속해서 뉴스에만 존재하는 먼일로 취급될 것이다.

반복되는 이야기, 예외가 아닌 사례들

민영씨와 지수씨의 사례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유정현(20대, 가명)씨도 하루 8시간 이상 전화 통화를 요구한 가해자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가해자는 싸울 때 심한 욕설을 일삼았고, 다음 날이면 "미안하다"며 울면서 본인 머리를 내려쳐 용서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고 했다.

정현씨는 성관계 요구를 거절하면 한없이 친절했던 가해자가 차갑게 돌변하는 것이 두려워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 그는 "노골적으로 강요했다고 말하긴 애매하지만, 가해자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않으면 분위기가 험악해져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민서(20대, 가명)씨는 "꼬집는 건 폭력이라기보다 장난에 가깝다는 생각에 처음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싸울 때 폭언을 하긴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배를 때리고 목을 조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했다.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현안대응팀 이제 활동가는 지난 12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친밀한 관계 내 폭력은 특정 시기에 급증한 범죄가 아니라 예전부터 이어져 온 문제"라고 말했다. 기존에 '연인 간 문제'로 묶여 있던 폭력이 뒤늦게 이름 붙여지고, 이제야 주목받고 있다는 설명이다.

성평등가족부가 발표한 '2025년 여성폭력통계'에 따르면 2024년 기준 평생 친밀한 관계 여성 폭력 피해 경험률은 19.4%다. 여성 5명 중 1명이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을 경험한 셈이다. 여성 폭력 상담 건수도 늘고 있다. 2024년 한 해 동안 한국여성의전화가 진행한 상담은 총 5만 5534건으로, 전년도(4만 8065건)보다 15.5% 증가했다. 그중 과반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했다.

 2023년, 2024년 한국여성의전화 전체 상담 건수
2023년, 2024년 한국여성의전화 전체 상담 건수 한국여성의전화

 2024년 폭력 피해 초기 상담 내 피·가해자 관계 유형
2024년 폭력 피해 초기 상담 내 피·가해자 관계 유형 한국여성의전화

정현씨와 민서씨 모두 '이런 일로 신고가 될까?' 하는 망설임 때문에 신고는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가해자와 안전하게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활동가는 "우리는 여전히 친밀한 관계의 폭력을 '사소화하는 문화' 안에서 살고 있다"며 "개인의 불운이나 가해자의 일탈, 병리적 문제로 축소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피해자의 문제 제기는 과민한 반응으로 여겨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처럼 통제와 강압을 사랑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는 교제폭력을 일상의 문제로 드러나지 못하게 한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젠더사회규범지수(Gender Social Norms Index)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 대상 37개국 가운데 성별에 대한 편견이 가장 악화한 나라로 보고됐다.

성역할 고정관념이 강할수록 통제·강압적 행동이 사랑이나 관계 문제로 축소되기 쉽다는 것이 UNDP의 설명이다. 이런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가 문제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내기까지는 더 큰 결심이 필요하다.

교제폭력 관련 상담과 신고 통계는 증가 추세지만, 피해자의 안전 수준이 향상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통계와 체감 안전 사이의 간극은 크다.

2025년 한국여성의전화가 발표한 '2024년 분노의 게이지'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 동안 친밀한 관계의 남성 파트너에게 살해된 여성은 최소 181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374명이다. 살인 피해자 유형을 보면 전체 181명 중 가해자가 배우자인 경우가 72명, 데이트 관계인 애인이 104명, 일방적 교제 등 기타 관계가 5명이었다.

이는 언론에 보도된 사건을 기준으로 한 '최소치'에 불과하다. 이제 활동가는 "반복되는 비극은 이런 폭력이 성차별적인 사회 구조와 인식 속에서 계속 허용되고 정당화되고 있기 때문"이라며 "입법과 제도 개선이 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제도 논의와 별개로 피해자들의 일상은 현재진행형이다. 민영씨는 지금도 동아리 활동에 가해자가 참석하는 날이면 스스로 활동에서 빠진다. 그는 "여전히 매일 그 일이 떠오른다"며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무기력한 시간이 늘어났다"고 토로했다.

지수씨 역시 헤어진 지 4년이 다 돼 가지만 불안은 계속되고 있다. 술에 취한 가해자가 새벽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기 때문이다. 그는 "본가에 가면 가해자를 마주칠까 두려워 거의 집에만 있게 된다"고 말했다.

관계는 끝났어도 통제와 공포의 경험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교제폭력은 '사소한 일'로 축소되기 쉽지만 피해자에게 그 순간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들의 일상은 아직 그 순간에 멈춰 있다.

[살아남은 여자들]
"미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교제폭력 3번의 신고,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https://omn.kr/2gr4r
#교제폭력 #젠더 #폭력의일상성 #한국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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