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개혁 공작원 모집 토지개혁 공작원 모집에 관한 공문
National Archives and Rec
사촌 형의 신고와 검거 시도
짧은 인공 시절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 군경이 수복했다. 밤에 몇 차례 경호원을 데리고 원평리로 오던 신장식의 소식도 끊겼다. 청주시 인민위원회와 민청에서 일했던 신장식의 형들도 소식이 끊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장식이 상복을 입고 마을에 나타났다. 검거령을 피해 위장을 한 것이다. 며칠 후에도 신장식은 무리를 지어 마을에 나타났다. 마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려워 누구도 신고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신장식이 나타났다는 정보를 접한 경찰들은 마을 주민들을 괴롭혔다. 신장식의 얼굴을 본 사람뿐만 아니라, 마을 청·장년 대다수가 강서지서로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몰매를 맞는 것은 보통이었고, 고문까지 당해야 했다.
그날은 신장식 일행 10여 명이 이장 집에 머무른 날이었다 . 병풍 뒤에 숨어 있던 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때였다. "꼼짝 마!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신장식 일행은 방 뒷문을 걷어차고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황급한 경찰들이 방아쇠를 당겼다. 한참을 쏘았다고 생각한 경찰들은 나중에야 자신들이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지 않았던 것이다. 뒤늦게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하는 소리가 콩 볶듯 했지만 때는 늦었다.
신장식 일행은 상신리 방향으로 도망쳤다. 상신리에서 교전이 벌어졌고, 교전 과정에서 신장식 일행 한 명이 체포되었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이날 경찰에게 신장식 일행을 신고한 이는 그의 사촌 형 신◯식이었다.
그렇다면 신◯식은 왜 사촌 동생을 신고했을까? 포상금이 탐나서 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신◯식은 인공시절 강서분주소장(강서지서장)이었다. 즉, 부역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국군 수복 후 경찰에 자수했다. 경찰은 그가 신장식의 사촌 형임을 알고, 채찍보다 당근을 내밀었다.
"네 사촌 동생을 신고하면 네 죗값을 없애 주겠다." 신◯식은 고민했다. 자신의 인공시절의 행적을 생각하면 중죄를 받을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사촌 동생을 신고하는 것도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랜 감옥 생활을 견디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고민하던 그에게 경찰은 감언이설로 달랬다. "당신이 신고하면 신장식의 목숨은 살려주겠소." 경찰의 말을 순순히 믿은 그는, 사촌 동생이 이장 집에 왔다고 신고했다. 경찰들이 번개같이 출동해 이장 집을 포위했지만, 검거에는 실패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이번에는 신장식과 그 일행이 신◯식 제거를 위해 마을에 나타났다. 신◯식은 사촌 동생을 신고한 후 마을에 있을 수 없었다. 덕분에 그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신장식 검거를 둘러싸고 강서면 원평리에는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았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와 민청 간부였던 신장식의 친형들은 행방불명이었다. 신장식의 동생은 원평리 옆 마을인 상신리 산자락에 굴을 파고 숨어 있었지만,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굴을 나온 신장식의 동생은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았다.
경찰의 자존심과 청주의 마지막 빨치산의 최후
경찰들이 신장식을 검거하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신장식이 인공 시절 노동당 청주시당 위원장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1년 5월 26일 남부군이 청주시를 습격할 때 길 안내를 맡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950년 겨울 난리 이후, 일개 도의 도청 소재지가 빨치산에 의해 일시적으로나마 점령된 것은 청주가 유일했다.
'청주시 습격 사건'은 국회에서도 논란이 될 정도였다. 그렇기에 치안 관계 기관인 경찰로서는 신장식 검거에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어차피 습격의 주체인 남부군은 지리산에 또아리를 틀고 활동하고 있었기에, 청주 경찰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길 안내를 맡고 지하에서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신장식을 검거하는 일은 청주 경찰로서는 운명을 건 일이었다. 청주경찰서는 역공작을 통해 신장식을 검거하려 했다. 청주 교동초등학교에서 신장식 일행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다.
신장식 일행을 에워싼 경찰이 또 한 번의 실수를 저질렀다. '탕' 이번에는 간부의 신호가 없었는데, 청주경찰서 사찰과 김◯◯이 총을 쏜 것이다. 신장식과 일행은 부리나케 몸을 피했다. 경찰은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쳐다보는 격이 되었다.
쫓고 쫓기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된 후였다. 신장식이 강서면 문암리 참외밭 원두막에 있을 때였다. 농사꾼으로 위장한 지게를 진 이들부터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원두막에서 20m 가까이 접근했을 때, 권총을 쥔 간부의 손이 움직였다. '탕' 하는 소리에 경찰들의 집중 사격이 이어졌다. 신장식이 날랜 동작으로 원두막에서 뛰어내리는 찰나, '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무릎이 꺾였다. 다시 일어서려는 그에게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와!' 하는 함성과 함께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다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신장식을 에워싼 경찰은 현장에서 담가를 만들었다. 죽이는 것보다 생포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담가에 실린 신장식은 경찰차에 태워져 도립병원(현재의 청주의료원)으로 향했다. 치료를 받던 중 신장식은 사망했다. 1953년 6월이었다. 청주의 마지막 빨치산, 신장식의 최후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공유하기
청주 마지막 빨치산, 경찰의 운명 건 생포 작전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