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시의회 개원식 1952년 제1회 청주시의회 개원식
청주시
1952년 5월 29일, 중앙초등학교 강당은 호떡집에 불난 격이었다. 초대 도의회 개원식이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중앙초등학교 강당이 충북도의회 건물로 이용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951년 5월 26일 남부군이 청주시를 습격해 도청 건물 일부를 방화했기 때문이다.
도의회 개원준비를 위해 탁자, 의자, 발언대, 방청객용 의자 등이 긴급 제작되었다. 오찬을 위해 교실 두 개가 임시로 사용되었다. 학교 뒷마당에서는 큰 가마솥에 고깃국을 끓였다. 도의원들과 도청 간부, 기자, 관계자들에게 국밥 한 그릇씩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개원식은 최고령자인 전병수(55) 의원의 의사봉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임시 의장으로 의장단 선출을 진행했다. 의장에는 청주 출신 최동선 의원이 당선되었다. 문제는 부의장 선거였다. 옥천 출신 권복인(자유당)과 청원 출신 한정구(무소속)가 2차 투표까지 동점을 기록한 것이다.
이럴 경우 의장이 고령자인 한정구 의원의 당선을 선포하면 되었지만, 결국 3차 투표까지 진행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었다. 방청석에 있던 자유당 충북도당 부위원장 신형식의 정치적 모략이 개입된 것이다.
당시 신형식은 부위원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위원장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는 무소속 의원들을 불러 "3차 투표를 실시해 권복인을 당선시키라"고 지시했다. 결국 규칙을 어기면서까지 자유당 소속 권복인을 부의장으로 당선시켰다.
의장단 선출이 끝난 후, 임시 의장 전병수는 단상에서 내려오는 대신 김경(제천)의원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이후 김경 의원은 '국회해산 결의안'을 제출했고, 투표 결과 재석 28명 중 찬성 23, 반대 0으로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개원식 하루 전날인 5월 28일, 자유당 충북도당 중집에서 국회해산권 결의안을 통과시키라는 지침을 받은 상태였다. 이 결의안은 도의원에게 국회해산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이승만의 정치공세를 뒷받침하는 거수기 역할에 그쳤다.
거수기 역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부산 정치파동 때 또 하나의 코미디가 벌어졌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노리며 추진한 대통령직선제와 상·하양원제를 골격으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장면 국무총리를 해임하고 장택상을 임명했다.
1952년 5월 25일,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남·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데 이어 개헌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는 등 국회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정부는 지방의원을 동원해 '국회해산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국민회와 대한청년단 등 단체와 백골단·땃벌떼 등 각종 폭력조직을 동원해 관제 데모를 부추기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초대 충북도의회 제1회 회기가 6월 4일 끝나자, 충북 도의원들은 관내 읍·면의회 대표들을 데리고 6월 10일까지 부산에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김경 의원은 충북 대표로 선정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했다.
면담 자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어서 물러들 가서 각자의 직책을 맡아 보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김경을 비롯한 충북 대표단은 "이승만 대통령 각하 만세"라며 만세삼창을 외쳤다. 즉, 지방의원들은 고유의 업무와 역할을 수행하기보다는 대통령의 거수기 노릇을 한 셈이었다.
전국 최연소 의원과 풀뿌리 민주주의

▲최동찬 1950년대 자유당 충북도당 앞에선 최동찬
최동찬
1956년 8월 8일 실시된 제2대 시·읍·면 의원 선거에서 최동찬은 만 30세에 전국 최연소로 청주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자유당 소속인 그는 특색 있는 선거운동을 했다.
그는 청주시 예산에 따른 세입·세출안을 근거로 합리적인 예산집행에 관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다른 후보들이 장황한 유세를 하는 동안, 최동찬은 단문 형태의 정책 중심 연설로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당선 후 청주시 업무를 충분히 숙지한 뒤 시정 감사에 임했다. 당시 자유당 충북도당 위원장은 제3대 충북도지사를 역임한 이명구였다. 초대 지방선거 당시인 1952년에는 제2대 충북도지사를 지낸 이광이 충북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자유당 충북도당은 1956년부터 당·정 협의회를 개최했다.
최동찬과 함께 제2대 청주시의원에 당선된 박학래 역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충남 청양 출신으로 양반가 후손이었지만, 조부가 동학농민전쟁에 연루돼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5세에 부모를 따라 청주로 이사했다.

▲박학래 1950년대 후반 청주시의원 시절의 박학래
박학래
15세에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참외 장수, 아이스크림 장수, 목욕탕 종업원, 화성관·북일여관 보이 등을 전전했다(국사편찬위원회, <우익단체 간부를 통해 본 1940~50년대 청주지역 정치·사회상>, 2009).
1954년 석교동 동회장 보궐선거에 출마한 박학래는 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그는 동회장 재임 시절, 명절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떡쌀과 명태 두 코씩을 나누어 주었고, 전주에 가로등 설치, 하수구 정비 사업 등도 진행했다.
1956년 석교동 반장들은 감옥에 갈 각오로 당사자 몰래 도장을 찍어 박학래를 청주시의원에 입후보시켰다. 그는 그해 시의원 선거에서 전국 최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1950년대 지방선거가 이승만 대통령의 거수기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풀뿌리 민주주의' 도입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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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치러진 첫 지방선거... '이승만 거수기' 노릇 한 지방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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