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02.10. 제주4·3희생자 청구재심 재판 공판안내
제주다크투어
같은 날 오후 4시,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노현미 부장판사)는 제주4·3희생자인 고 신두원의 아들 신권섭이 청구한 재심 재판(2025재고합16)을 진행했고, 고 신두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고 신두원은 외도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47년 포고 제2호 및 법령 제19호 위반죄로 벌금 3천 원에 처했다. 검사가 밝힌 당시 공소 요지에 따르면, 신씨는 3월 1일 제주 외도리부터 제주읍까지 청년들과 시위에 참가하고, 3월 10일에는 외도리 공회당에서 30명과 무허가집회를 하여 3.1절 발포사건 관련하여 경찰에 대한 요구 조건을 결의하였다는 내용이다. 1950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는데, 이때는 신씨가 남로당의 평당원으로 가입했고, 무장대에 금품 등을 제공하는 등 협조하였다는 혐의였다.
임재성 변호사는 최종 진술에서 신지섭씨가 아버지 고 신두원을 2000년에 4·3희생자로 신고할 당시의 내용을 밝혔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양민증을 받으러 오지 않는 자는 모두 잡으러 온다. 그래서 죽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1948년 12월 8일 가족을 데리고 산으로 도피했다. 6개월 동안 숨어서 살다가 먹을 것도 없고 잡히면 다시 죽을까 봐 스스로 파출소로 자수하였는데, 그 이후 아버지는 고문받고 취조를 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임재성 변호사는 신지섭씨가 이번 재심을 통해서 아버지가 어떤 판결을 받으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며, 기록상으로는 1947년 7월 재심 대상 판결이 확정됐고, 이후에 형이 확정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 그 이후에 이 사건 피고인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하셨는지 지금까지도 듣지 못하는 상황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두 자녀가 노인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서 오늘 재판정에 선만큼 청구인들을 위로할 수 있는 판결이 선고되길 바란다며 진술을 마쳤다.
고 신두원의 딸 신00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작은고모와 작은고모 할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는 출산해서 3일 만에 동네 사람들이 다 산들에 올라가라고 하니까. 우리 고모할머니가 애기 구덕에 나를 지고, 우리 어머니는 출산 3일 만에 지팡이를 짚으면서 올라가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또 아래로 내려가라고 하면 우리 어머니는 출산한 몸으로 아래로 내려오고 하다 보니까 결국 병이 났습니다. 저는 어머니 젓도 빨아보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그 상태로 바람을 맞아서 3년 살아도 저에게 젓 한 번 못 먹였습니다.
우리 성할머니(친할머니)는 너무 일이 많아서 어머니가 힘들게 날 업어서 외할머니네 집에 가니까, 옛날에는 차도 없었습니다. 외도에서 애월까지. 외할머니는 오다가 나무 사이나 돌 틈에 그 애기를 버리고 오지 그걸 데리고 왔다고 우리 어머니한테 그렇게 얘기했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외할머니는 모인 좁쌀을 사다가, 얻어다가 막 끌이고 채에 걸러서 그거를 먹여서 나를 살렸답니다.
오빠는 호강 받으며 잘 컸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가 나를 낳고 맨날 아팠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3월에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6월이 제사합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보지도 못했지만, 내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도 한 번도 못 해보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래도 외할머니가 저를 키워줘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를 보내도 제가 하도 먹질 못해서 작았어요. 제일 작고 밥이라도 조금 먹으면 설사를 하고 1년에 학교를 50일, 100일도 못 다닐 정도로 아팠으니까요. 겨우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고생하는 것도 좋으니, 평생에 한 번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봤으면, 손이라도 잡아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이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 아버지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식들이 다 이렇게 피눈물 흘리면서 살게 합니까?
이어서 고 신두원의 아들 신지섭은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저는 연좌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공부할 의욕이 안 생겼습니다. 대학도 가고 싶었으나 연좌제 때문에. 선생님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연좌제에 걸려서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그냥 살아왔습니다.
이날 세 번의 재판을 연달아 진행한 노현미 부장판사가 제주4·3특별재판부를 떠나 전근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다.
지난 1년 간 생존 수형인 재판을 비롯한 여러 재판을 통해서 제주4·3 사건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참혹한 사건이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목도하면서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으로 재판에 임해왔습니다. 생존 희생자분은 16살에 꽃다운 소년에서 90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추석 명절에 재심 판결문이라도 차례에 올려 희생자의 억울함을 위로하고자 한다는 유족분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억울함이 얼마일지 가늠하기 어렵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데 너무나 긴 시간이 흘러서 원통함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사건 역시 대다수 피고인들이 벌금형이 선고되었지만 많은 희생자분들이 행방불명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하여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부디 오늘 이 판결의 선고가 그동안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고 희생자분들과 유족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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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다크투어 대표입니다.
기억하고 싶은 길, (사)제주다크투어는 제주도에 위치한 비영리 단체입니다. 제주도 곳곳에 있는 4·3 유적지들을 비롯한 역사 현장들을 함께 방문하고 기록하고 지켜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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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이 왜 참혹하게 총살을 당해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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