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6.02.26 16:28수정 2026.02.26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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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19년 3월 1일, 조선이 외세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며 동시에 주권이 군주가 아닌 국민에게 있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한 날이다. 만세운동은 종교나 계급의 구분 없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당시 시위 참가자들은 비폭력 원칙을 지켰으나, 일본 헌병과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1919년 3월 1일의 함성은 단순한 독립 요구를 넘어 민권과 자주 의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 삼일절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전하고자 태극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구상했다. 그 계기는 과거 박물관에서 보았던 여러 장의 태극기였다.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것으로, 역사와 세월이 묻어 있었다. 어떤 태극기에는 김구 주석의 글이 있고, 또 어떤 것은 한국전쟁 당시 부대원들이 돌아가며 이름을 새긴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의 모습을 증언하는 살아 있는 사료였다. 그 태극기에서 단순히 한 나라의 상징을 넘어, 역사적 기록을 보았다.

▲33?3=3.1 태극기 삼일절 에디션 태극기에 민족대표 30인을 그려넣었다. 원래는 33인이지만 후에 친일로 돌아선 3명은 그려넣지 않았다.
주환선
그 기억을 바탕으로 나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을 시각화하는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했다. 다만 변절자로 평가된 박희도, 최린, 정춘수는 제외했다. 작품에는 나머지 30인의 초상을 배치하고, 선언서의 전문을 세로쓰기로 옮겼다. 서체는 만해 한용운의 필체를 바탕으로 했다. 결과적으로 단순한 태극기가 아니라, 1919년의 사건과 인물들이 함께 담긴 시각적 역사 자료가 되었다.
SNS에는 '33–3=3.1 태극기 삼일절 에디션'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했다. 그러나 실제 공간에 걸린 태극기를 통해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3월 1일 전후의 전시장 예약은 이미 마감되어 있었다. 그때 '게릴라 전시' 형식을 떠올렸다. 공공장소에서 지역 주민과 학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수막이 그리 크지 않아 배경을 크게 가리거나 이질감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치는 2024년 2월 9일부터 3월 2일까지 천안의 한 산책로를 선택했다. 이곳은 학원가와 초등학교가 인접해 청소년들의 통행이 잦았고, 저녁이면 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2월 9일 새벽, 현수막 천에 인쇄된 태극기를 설치했다.
행정적인 제재나 훼손의 우려가 있었지만 누군가라도 이 작품을 통해 1919년의 의미를 떠올려 준다면 그 자체로 목적은 충분했다. 천안은 독립운동사에서 상징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유관순 열사가 활동했던 곳이자, 3·1운동 당시 주요 시위가 일어난 중심지 중 하나였다. 전시는 그 맥락과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천안 서북구에 설치하였던 삼일절 태극기 2024년 2월 9일 부터 3월 2일 까지 천안 서북구에 설치하였다. 마무리까지 훼손 없시 전시 되었다.
주환선
그해 2월은 평소보다 비와 눈이 잦았다. 태극기는 방수 합성섬유 천에 인쇄했지만, 강풍과 눈에 대한 걱정이 있었다. 약 3주간의 전시 기간 동안 현수막은 손상되지 않았다. 훼손이나 낙서도 없었다. 태극기가 사라지거나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계획되지 않은 형태로 이뤄진 전시였지만, 관람 동선과 장소가 의도치 않게 조화를 이루었다. 태극기는 그렇게 3월 2일 새벽 조심스레 철거했다.
현재 '33–3=3.1 태극기 삼일절 에디션'은 미국의 내 작업실 벽에 걸려 있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태극기는 단순한 국기를 넘어 나의 정체성을 잊지 않게 해주는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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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절 태극기 설치 영상 2024년 2월 9일 이른 새벽 천안시 서북구에 있는 산책로에 태극기를 설치하였습니다. ⓒ 주환선
2024년의 프로젝트는 큰 대중적 반향을 얻지 못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태극기를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몇몇은 짧은 순간이라도 삼일절의 의미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나의 작업은 일시적인 퍼포먼스가 아니라 기억과 기록의 한 과정이다. 전시는 종료되었지만, 같은 주제는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매체가 그림이든 글이든, 형식은 다를 수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거창할 필요가 없다. 한 사람의 기억, 집 앞에 걸린 작은 태극기, 때로 들르는 기념관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쌓이는 개인의 실천이 한 시대의 정신을 이어간다고 믿는다. 역사는 거대한 사건보다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이어져 왔다. 나 역시 그 마음을 잇는 한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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