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밀턴 그레인저 기념관 앞에서 해밀턴의 초상이 든 10달러 지폐를 들고
장소영
작은 마당을 지나 언더그라운드(지하층)에 있는 안내소로 들어가니, 가이드 투어 접수처가 있었다. 온라인 예약은 받지 않고, 먼저 오는 순서대로 이름을 적으면 된다.
투어를 기다리는 동안 해밀턴의 일생을 담은 작은 전시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택이 완공될 무렵 해밀턴은 이미 정계에서 물러난 뒤였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둘러보다 전시관 끝에서 딸이 짧게 탄식했다.
"아, (이 집에선) 겨우 2년밖에 살지 못하고 돌아가셨네요."
해밀턴은 복잡한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맨해튼 북쪽에 작은 농장을 사고, 스코틀랜드에 있다는 조부의 저택 이름을 가져와 'Grange(그레인지)'라 불렀다. 지금은 '해밀턴 그레인지 국립 기념관(Hamilton Grange National Memorial)'이 정식 이름이다.
가이드 N에 따르면, 평화로운 농장에 가족을 살게 하려고 해밀턴은 맨해튼 남쪽의 법률사무소까지 몇 시간씩 왕복 출퇴근 했다고 한다.
전쟁 영웅으로, 초대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초대 재무장관으로 중요한 요직을 거쳤지만 해밀턴은 딱히 재산을 끌어모으지 않았다. 워싱턴, 제퍼슨, 매디슨 등의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큰 농장과 대저택을 소유한 귀족이었지만 해밀턴은 달랐다. 그레인지는 나이 마흔을 훌쩍 넘어 처음 가져보는 자신의 농장이고 집이었다.
아내에게 불륜 사건을 용서받고, 결투로 숨진 아들에 대한 슬픔도 달래며 드디어 자신의 둥지를 마련했지만, 해밀턴은 정적 아론 버(Aaron Bur)와의 결투로 치명상을 입은 뒤 하루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나이 겨우 49세였다. 명사수였던 해밀턴의 패배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가이드를 통해 재미있는 사실도 하나 알게 되었다.
"아니에요, 제 말은 해밀턴 가족이 아니라 '집이 이사를 했다(Moving-옮겨가다)'는 뜻이에요."
세월이 흘러 부지가 여러 소유주를 거치게 되면서, 저택을 헐지 않고 계속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연구됐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고심끝에 집을 그대로 들어 올려 안전한 다른 부지로 옮겼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가이드가 알려준 유튜브 채널에서 당시의 영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현재 해밀턴-그레인지는 최초의 터에서 몇 블록 떨어진 세인트 니콜라스 공원(St. Nicholas Park) 내에 자리한다.
해밀턴 부부가 잠들어 있는 곳으로
다시 지하철을 타고 이번엔 맨해튼 남쪽으로 '해밀턴'을 만나러 갔다.
뉴욕 증권거래소가 위치한 월스트리트에는 뉴욕이 미국의 수도였던 당시 정부 건물로 쓰이던 장소(페더럴 홀, Federal Hall National Memorial)가 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도 여기서 취임 선서를 했다.
증권거래소에서 브로드웨이를 건너가면 뾰족한 첨탑의 트리니티 교회가 보인다. 해밀턴은 아내와 함께 교회의 묘원에 잠들어 있다.
아내 엘리자베스야말로 해밀턴의 명성을 지켜낸 가장 큰 공로자가 아닐까 싶다. 해밀턴의 사후, 그녀는 해밀턴의 글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그의 사상과 업적을 지켜냈다. 오히려 해밀턴 사후에, 엘리자베스는 방대한 영역의 활동을 통해 그녀의 진가를 드러내었다고 평가 받는다. 해밀턴 평전을 쓴 작가 론처노는 엘리자베스가 고아와 결혼했고, 고아를 입양해 키웠으며, 고아원을 건립했다고 표현했다. 브루클린에는 그녀가 설립한 입양기관(Graham Administrative, 1806)이 220년째 운영되고 있다.

▲ 트리니티 교회의 기념동판 중 하나. 트리니티 교회가 킹스칼리지를 처음 세우고 후원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지금의 콜롬비아 대학이다. 해밀턴은 트리니티 교회가 세운 학교를 다녔고, 트리니티 교회의 묘원에 묻혔다.
장소영
해밀턴은 연설가였다기보다 필력이 뛰어난 사상가였다. 귀족 정치가들을 상대할 때도, 의회를 설득해 연방 은행을 설립하고 초기 중앙 정부의 재무 구조를 구축해 갈 때도 그의 펜은 노련하게 움직였다. 미국의 위대한 시인 브라이언트가 편집장을 지내며 노예 해방을 지지하는 명문장을 실었던 <뉴욕 이브닝 포스트>(현 <뉴욕 포스트>)의 창간자도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생가에서 만났던 한 방문객이 가이드에게 '해밀턴은 혁명가였는지 혹은 이상주의자였는지' 물었다. 가이드는 직답을 피했지만, 웃으면서 해밀턴이 시대를 앞선 선구자였던 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고 답했다.
'청렴한 애국자, 용맹한 군인, 탁월한 지혜의 정치가 (THE PATRIOT OF INCORRUPTIBLE INTEGRITY/THE SOLDIER OF APPROVED VALOUR/THE STATESMAN OF CONSUMMATE WISDOM)'
알렉산더 해밀턴의 묘비에 적힌 글이야말로 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듯싶다.

▲ 트리니티 교회 묘원의 해밀턴 묘소.
장소영
소년 해밀턴은 식민 지배하의 서인도제도에서부터 노예제 폐지와 흑인과 백인이 동등한 인격임을 자각했다고 한다. 미국 본토로 건너온 후 해밀턴은 귀족이라는 신분, 세습, 소수에게 몰린 권력과 부를 한 번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번영의 실마리를 '실력주의 사회'에서 찾았다. 미국으로 모여든 이민자들과 각양각색의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만드는 다양성이야말로 미국의 진정한 자산이라고 여겼다.
독립 선언을 하고 대통령제를 채택하긴 했지만, 건국의 아버지들은 유럽 정치의 모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에서 알렉산더 해밀턴은 삼권 분립의 민주주의 체계와 각각이 지닌 다양성의 장점이 극대화된 미국 사회가 나아갈 길을 꾸준히 닦아 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주 미국 연방대법원이 알렉산더 해밀턴의 말을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 조치가 위법하다고 판단한 것이나, 뮤지컬 <해밀턴>이 유색인 배우만을 캐스팅한 것은 모두 해밀턴의 생각을 잘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뮤지컬 <해밀턴>팀은 트럼프 정부 1기 시절 펜스 부통령이 공연 관람을 오자, 커튼콜에서 주연배우가 그에게 '이민자와 다양성'에 대한 작심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지난해에는 수도 워싱턴 DC의 유명 공연장 케네디 센터가 트럼프-케네디 센터로 이름이 바뀌자, 아예 공연을 취소해 버렸다.
한가했던 생가에 비하면, 해밀턴의 묘소는 찾는 이가 많았다. 뮤지컬 <해밀턴>의 상징적 포즈인 오른손을 하늘로 들고 사진을 찍는 방문객들도 더러 있었다. 미국의 미래를 향한 선구안이 훌륭했던 것에 비해, 구시대적 문화인 결투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모순되는지... 딸은 그 포즈로 사진 찍는 것을 거부했다.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 포즈였기 때문이란다.
어쩌면, 해밀턴은 자신의 정적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조차 포기함으로써 냉혹한 정계에도 개혁의 돌을 던진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미국은 건국 250주년을 맞는다. 조지 워싱턴은 왕이 되어달라는 주변의 요구를 뿌리치고, 대통령제를 선택했다. 3선의 유혹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권뿐 아니라 법과 제도, 문화, 종교와 시민의 권리까지 유럽으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렇게 250년이 지나는 동안 미국은 얼마나 성숙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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