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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향으로 살아온 40년, 바리스타 박이추의 인생 드립

[100인 100색] 기술보다 사람을, 커피보다 삶을 말하는 한국 1세대 바리스타의 기록

등록 2026.03.15 18:52수정 2026.03.15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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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커피 가루 위에 내려앉는다. 물이 닿자 가루는 숨을 쉬듯 천천히 부풀어 오른다. 그 사이로 은은한 향이 퍼진다. 느린 손놀림 속에서 커피의 쓴맛과 산미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잔에는 깊은 향과 잔잔한 여운이 고요히 담긴다.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물의 온도와 흐름을 살핀다. 주전자를 천천히 기울여 원을 그리듯 몇 차례에 나누어 물을 붓는다.

어느덧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하루 쌓여온 커피 향은 그의 삶을 이루는 깊은 결이 되었다. 3월 둘째 주 토요일, 향기로 가득한 가게에서 평생 커피와 함께해 온 한 커피 명인을 만났다.

 커피 드립 과정에서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에 닿자 빵처럼 부풀어 오르며 향이 피어나는 순간
커피 드립 과정에서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에 닿자 빵처럼 부풀어 오르며 향이 피어나는 순간 진재중

"강릉, 커피 향을 지키는 장인과의 만남"

강릉 바닷가에서는 바다의 비릿한 냄새보다 커피 향이 더 먼저 다가온다. 바다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를 무렵, 한적한 산모롱이에서 불이 켜진다. 문틈 사이로 깊고 향긋한 커피 향이 흘러나온다. 사람보다 먼저 깨어난 향기다. 강원도 강릉 연곡면에 자리한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다.

한국 1세대 바리스타인 박이추(74) 명인의 하루는 커피를 볶는 일로 시작된다.

"지금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가장 집중해야 할 시간이에요."

가게 안에서 커피콩을 고르던 그의 부인이 조용히 말을 건넨다. 그 목소리에는 묘한 긴장감이 묻어 났다. 마치 시험을 앞둔 고3 수험생이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어머니의 모습과도 닮아 있다.


고소한 향이 나는 커피공장으로 들어가 봤다. 로스터 안에서 커피콩이 이리저리 뛰어 다닌다. 뜨거운 열 속에서 천천히 색을 바꾸고 향을 품어 간다. 그의 시선은 그 움직임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다. 콩의 색과 퍼져 나오는 향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내는 눈빛은 매섭다. 잠시 말을 건네자,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 답한다.

"로스팅은 시간에 따라 맛이 좌우됩니다. 잠깐이라도 타이밍을 놓치거나 한눈을 팔면 커피의 맛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커피 한 잔의 맛이 결국 몇 초의 집중에서 갈린다고 말한다. 시선은 다시 로스터 안에서 볶아지는 커피콩 위에 머문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커피의 완성도는 결국 사람의 오감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로스팅 과정에서 귀로는 원두가 터지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퍼지는 향을 맡으며, 눈으로는 점점 짙어지는 콩의 색을 살핀다. 여러 감각을 동시에 집중해 가장 알맞은 순간을 찾아내는 그 짧은 판단이 커피의 깊은 맛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커피를 볶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박이추 명인
커피를 볶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박이추 명인 진재중

 이른 아침 로스터 안에서 커피콩이 볶아지며 하루의 커피가 시작된다
이른 아침 로스터 안에서 커피콩이 볶아지며 하루의 커피가 시작된다 진재중

"커피를 향한 한 사람의 시간"

박이추 명인은 좀처럼 손님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가게 안쪽 주방에서 커피를 볶는 일에 온 신경을 쏟는다. 직접 커피를 내리는 모습 또한 쉽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멀리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이곳에서 박이추 명인을 직접 만나는 일은 작은 행운처럼 여겨진다.

가게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만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연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가게 문은 닫는다. 그 시간은 휴식이 아닌 공부의 시간이다. 커피를 더 깊이 연구하거나 새로운 산지와 문화를 찾아 커피 여행을 떠난다. 결국 그의 일상은 언제나 커피로 이어진다. 문을 열어도, 문을 닫아도 그의 하루는 늘 커피와 함께 흐른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단지 커피 한 잔 때문만은 아니다. 오랜 세월 한결같이 향을 지켜온 한 사람의 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한국 1세대 바리스타인 박이추. 올해 일흔넷이 된 그는 지금도 커피 앞에서 가장 엄격한 학생처럼 배우고 탐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커피 명인'이라 부른다.

 명인의 커피 한 잔을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손님들. 이곳에서는 기다림도 커피의 한 과정이다
명인의 커피 한 잔을 위해 조용히 기다리는 손님들. 이곳에서는 기다림도 커피의 한 과정이다 진재중

화려하지 않아 더 깊은 공간

2층으로 된 가게 내부는 화려하거나 고급스럽지 않다. 묵직한 커피 향이 가득한 빈티지한 공간이다. 오래된 나무 가구와 로스팅 기계, 세월의 흔적이 묻은 도구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위층은 손님들이 커피를 마시며 머무는 공간이고, 아래층은 세계 각지에서 들여온 다양한 원두로 가득차 있다. 화려함 대신 세월의 깊이가 배어 있는 이 공간은, 오랜 시간 커피와 함께해 온 주인의 모습과도 꼭 닮아 있다.

 커피와 관련된 책과 도구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커피와 관련된 책과 도구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진재중

 전세계에서 들여온 커피 원두
전세계에서 들여온 커피 원두 진재중

장인의 손끝에서 태어나는 커피

그는 오늘도 직접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린다. 손목과 팔꿈치는 성할 날이 없지만, 커피를 내리는 순간만큼은 통증조차 잊는단다. 수십 년 반복해 온 동작 속에는 장인의 고집과 삶의 무게가 함께 스며 있다.

"커피는 몸과 마음에 따라 맛이 달라집니다. 어떤 날은 달고, 어떤 날은 쓰지요. 꼭 인생 같아요."

박이추 명인은 잔을 내려놓으며 조용히 말한다. 같은 원두와 같은 물, 같은 도구로 커피를 내려도 그날의 공기와 사람의 마음에 따라 향과 맛은 조금씩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는 커피를 단순한 음료로 생각하지 않는다. 한 잔의 커피에는 그날의 시간과 기분, 그리고 그것을 마시는 사람의 이야기가 함께 담긴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서두르지 않는다. 물을 붓는 속도와 온도, 향이 피어오르는 순간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커피는 급하게 만들면 금방 식어버립니다. 천천히 내려야 향도 오래 남지요."

그의 말처럼 커피를 내리는 시간은 마치 삶을 대하는 태도와도 닮아 있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커피를 내린다. 그리고 그 잔을 마시는 사람들의 하루가 조금은 따뜻해지기를 바라며, 또 한 번 주전자를 천천히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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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명인의 드립 커피향으로 살아온 박이추명장의 인생드립 ⓒ 진재중


 정성을 다해 내린 커피 한 잔이 잔 위에 담겼다.
정성을 다해 내린 커피 한 잔이 잔 위에 담겼다. 진재중

우유를 짜던 손, 커피를 내리다

그는 커피를 내릴 때의 손놀림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목장을 하며 젖소 우유를 짜던 경험이 손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리듬과 힘 조절이 필요한 작업이었고 손끝의 감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때 익힌 손솜씨가 지금의 커피를 내리는 동작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말한다. 물줄기의 속도와 양을 조절하며 천천히 원두 위에 물을 붓는 손놀림에는 목장에서 우유를 짜던 때의 리듬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커피에는 단순한 기술을 넘어, 오래된 몸의 기억과 시간이 함께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직접 커피를 내리는 박이추 명인
직접 커피를 내리는 박이추 명인 진재중

재일교포에서 커피 장인으로... 혜화동 보헤미안의 시작

그의 삶이 처음부터 커피와 함께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 규슈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 대부분을 목장에서 보냈다. 젖소를 돌보며 흙과 풀 냄새 속에서 살아온 시간이었다. 서른여섯이 되던 해, 문득 도시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커피가 그 역할을 해줬다. 그는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커피를 배우고, 서울로 돌아와 1988년 혜화동에 작은 카페를 열었다. 이름은 보헤미안,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삶처럼 커피 또한 하나의 예술로 완성하고 싶다는 뜻을 담았다.

그가 직접 볶은 원두로 내린 진한 커피는 당시 사람들에게 낯선 맛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많은 이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낯설고도 깊은 맛은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다양한 커피 서로 다른 원산지와 풍미의 커피콩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다양한 커피 서로 다른 원산지와 풍미의 커피콩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진재중

커피를 찾아 떠난 길, 영진에 뿌리 내리다

번잡한 도시의 속도는 그를 오래 붙잡지 못했다. 서울을 뒤로하고 강원도 오대산 자락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그곳 역시 오래 머물 곳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바다로 향했다. 파도 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강릉 경포에서 새로운 커피 인생을 시작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아직 커피 문화가 자리 잡지 않았던 강릉에서 핸드드립 커피는 사람들에게 낯선 맛이었다. 깊고 쌉쌀한 커피의 풍미는 당시 익숙했던 다방커피와는 달라서 사람들에게는 커피의 맛보다 낯섦이 먼저 다가왔다.

"처음에는 드립 커피를 보고 사람들이 한약 같다고 했어요. 너무 쓰다며 마시지도 못하겠다고들 했지요."

결국 그는 경포의 가게 문을 닫고 다시 길을 떠났다. 몇 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마지막으로 강릉 영진해변 인근에 정착했다. 당시 그곳은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곳으로, 바다 바람만 스쳐 지나가는 조용한 자리였다. 그는 그곳에 'BOHEMIAN COFFEE'라는 간판을 내걸고 다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고, 그의 커피 인생도 그곳에서 새로운 시간을 이어가게 되었다.

커피 향은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 향을 따라 몇몇 마니아들이 조용히 찾아오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원두를 직접 볶아 내리는 로스팅 커피의 깊은 향과 맛을 점차 받아들였다. 그렇게 이곳은 커피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하는 명소가 되었다.

보혜미안 커피샾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에 위치한 커피가게
▲보혜미안 커피샾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에 위치한 커피가게 진재중

기술보다 삶을 말하는 커피 명인

현재 강릉은 대표적인 커피 도시로 불린다. 해마다 열리는 강릉커피축제에는 수십만 명의 방문객이 몰려들며 도시 전체가 커피 향으로 물든다.

오늘의 강릉 커피 문화에는 그의 시간이 깊이 스며 있다. 강릉에서 직접 원두를 볶고 커피를 내리며 핸드드립 문화를 꾸준히 알렸고, 그 과정에서 강릉이 '커피 도시'로 자리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이추 명인은 "사람이 커피를 찾는 것보다 커피가 사람에게 다가왔다".고 말한다. 그는 축제가 열릴 때마다 많은 양의 커피를 무료로 나눠왔다. 거액에 이르는 커피를 아낌없이 기증하며 사람들과 커피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커피로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준다는 마음에서다.

기술보다 사람을 먼저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각종 강연에 나가면 커피 로스팅이나 드립보다 여행과 독서, 삶의 태도를 이야기한다. "커피에는 의미가 있다. 행복을 주는 메시지가있다"는 말은 그의 신념에 가깝다.

인생의 쓴 향, 다시 나누기 위해

해 질 무렵 마지막 손님이 떠나면 가게 안은 다시 고요해진다. 하루 동안 이어지던 커피의 시간도 천천히 막을 내린다. 수십 년 동안 그가 잔 위에 담아온 것은 단지 커피 한 잔만이 아니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억 또한 함께 스며 있다.

가게 문을 닫은 뒤에도 그의 하루는 끝나지 않는다. 커피 관련 서적을 펼쳐 들며 또 다른 배움을 이어간다. 일흔이 넘은 지금도 커피는 끝난 결과가 아니라 계속되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박이추 명인 커피와 관련된 서적을 보며 지금도 커피를 배우고있다
▲박이추 명인 커피와 관련된 서적을 보며 지금도 커피를 배우고있다 진재중

사람보다 먼저 기억되어야 할 향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커피가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짧은 말이지만 그 안에는 오랜 세월 커피 한 길을 걸어온 장인의 생각이 담겨 있다. 사람보다 커피의 향과 맛이 먼저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국 1세대 바리스타 박이추의 그 한마디는 평생 커피를 마주해 온 명인만이 건넬 수 있는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그는 바다를 바라본다. 마음은 다시 조용한 곳을 향한다. 사람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는 한적한 자리에서 조용히 커피를 내리고 싶기 때문이다. 화려한 도시의 중심이 아니라 바람과 파도가 가까운 곳에서 한 잔의 커피를 정성껏 준비하는 일, 그것이 평생 커피와 함께해 온 그의 삶의 방식이다. 박이추에게 커피는 직업을 넘어선 삶 그 자체다. 그래서 그의 시간은 오늘도 조용히 커피 향과 함께 흐르고 있다.

박이추 명인 먼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는 주인공
▲박이추 명인 먼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있는 주인공 진재중






#박이추 #바리스터 #갈응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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