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을 졸업하러 떠난 곳, 병산서원

등록 2026.03.02 14:01수정 2026.03.02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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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과 주변의 일상을 기록해왔다. 오래된 필름카메라를 통해 사라져 가는 풍경과 기억, 기록의 의미를 묻는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기자말]
2월의 마지막 주였다. 겨울의 꼬리가 여전히 매섭게 휘감기던 오전 6시, 나는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손때 묻은 디지털 라이카(Leica) 한 대. 그리고 렌즈 너머로 세상을 흑과 백으로 치환할 준비를 마친 채 차가운 공기 속으로 발을 들였다. 안동의 아침은 유난히 고요했고, 폐부 깊숙이 박히는 공기는 날카롭지만 신선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굽이굽이 들어가면 병풍처럼 둘러선 병산(屛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산을 앞에두고 낮게 엎드린 병산서원. 아직 개방되지 않은 시간의 서원은, 수백 년 전의 문장을 품은 채 깊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닫힌 공간은 오히려 상상의 통로가 된다. 색(色)이 사라진 라이카의 뷰파인더 안에서, 서원은 비로소 형태와 본질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Leica SL2-s촬영 아직 개방 시간이 되지 않은 사당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Leica SL2-s촬영 아직 개방 시간이 되지 않은 사당은,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재필

만대루(晩對樓), 늦게 마주하는 빛의 환희

첫 번째 셔터를 누른 곳은 마당 안쪽이였다. 뒤틀린 나뭇가지가 프레임을 감싸고, 그 사이로 만대루의 육중한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흑백으로 담아낸 만대루는 시간이 응축된 거대한 조각상 같았다. 색을 지우니 나무의 결은 더 도드라졌고, 시간의 감각은 서늘할 정도로 또렷해졌다.

'늦게 마주한다'는 뜻의 만대루. 낙동강과 병산을 한눈에 품는 이곳은 서애 류성룡의 정신이 깃든 강학의 무대다. 나는 문득 2월이라는 계절에 서 있는 '졸업'의 의미를 반추했다.

자료를 보니 조선의 서원엔 정해진 졸업식이 없었다고 한다. 수시 입학하고, 스스로 깨우쳤을 때 비로소 떠나는 구조. 스승 앞에서 경전을 완벽히 이해했음을 증명하는 그 찰나가 곧 졸업이었다. 타인이 정해준 속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학문이 차오르는 순간을 기다리던 시절. 흑밴사진의 선명한 흑백 대비처럼, 그들의 마침표는 얼마나 명징했을까.


Leica SL2-s촬영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받고 있는 만대루의 전경
▲Leica SL2-s촬영 아침 햇살을 눈부시게 받고 있는 만대루의 전경 이재필

두 번째 사진 속, 만대루는 강렬한 역광에 휩싸여 있다. 렌즈를 파고든 빛의 잔상(Flare)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문은 닫혀 있지만, 그 닫힘은 배제가 아닌 기다림이다.

이 고요한 시간, 과거의 유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마루 아래 가지런히 고무신을 벗어두고 스승께 문안을 올렸을 것이다. 부엌에선 밥 짓는 연기가 낮게 깔리고, 누군가는 <논어>를, 누군가는 <맹자>를 읊조렸을 테다.


지금으로 치면 엄격한 '공대'와도 같았을 이 무채색의 공간에서, 나는 잠시 불손한 상상을 해본다. 수업을 빼먹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나의 어린 시절. 만약 내가 이곳의 유생이었다면, 분명 스승의 지팡이를 피하지 못했을 게으른 학생이었을 터다. 셔터를 누르는 손끝에 묘한 동질감과 참회(?)가 교차한다.

Leica SL2-s촬영 만대루 아래에서 복례문(復禮門)을 바라본 모습 - ‘복례(復禮)’는 『논어』의 구절,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
▲Leica SL2-s촬영 만대루 아래에서 복례문(復禮門)을 바라본 모습 - ‘복례(復禮)’는 『논어』의 구절, “극기복례(克己復禮)”에서 비롯된 말이다.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 이재필

기둥 사이, 찰나와 영원의 경계

세 번째와 네 번째 사진에서 렌즈는 만대루 아래 기둥 사이를 파고든다. 굵고 거친 기둥이 화면을 수직으로 나누고, 그 틈으로 겨울 아침의 긴 그림자가 사선으로 꽂힌다.

이 기둥 사이에서 누군가는 '이해했다'는 확신을 얻고 고향으로 떠날 짐을 꾸렸을 것이다. 졸업은 화려한 의식이 아니라,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된다는 스스로의 결심이었으리라.

살짝 뒤로 물러나 기둥 틈 사이로 강당을 엿본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문짝은 마치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처럼 보인다. 만대루 마루에 앉아 병산을 바라보며 공부하면 절로 도가 트일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끝내주는 풍경을 안주 삼아 약주 한 잔을 몰래 기울였을 것만 같다. 영남의 담담한 사색과 풍류가 이 흑백의 프레임 속에 녹아있다.

Leica SL2-s촬영 '광영지'에서 바라본 만대루의 풍경
▲Leica SL2-s촬영 '광영지'에서 바라본 만대루의 풍경 이재필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 거대한 건축미보다, 나에게 병산서원은 '2월 아침의 공기'로 기억될 것이다. 아무도 없는 마루, 서서히 빛으로 씻겨 내려가는 기둥,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침묵.

한 시간 남짓, 셔터 소리만이 고요를 깨웠다. 카메라는 기록의 도구지만, 때로 그것은 질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내가 이 차가운 겨울 서원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졸업이라는 제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성찰'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원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았다. 병산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만대루의 기둥들은 내가 던진 모든 질문을 묵묵히 품어주고 있었다. 내 가방 속 메모리에는, 2026년 2월의 빛과 수백 년 전 유생들의 그림자가 한데 섞여 기록되어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병산서원 #유네스코유산 #졸업 #안동 #라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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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이자 작가로 활동하며 전통시장, 지역의 일상, 사라져가는 풍경을 기록해왔다. 『Finding Ai』, 『시장사진』 등 개인전과 사진집 작업을 통해 장소에 남은 감정과 사람의 온기를 포착한다. 일상의 장면을 사진으로 질문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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