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기생들, 정월대보름 앞두고 '깃발시위' 주도

일제강점기 군산 '기생조합'과 '권번' 기생들의 활동상⑧

등록 2026.03.03 16:05수정 2026.03.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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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선전 행렬 모습(1928년 1월 28일 자 ‘동아일보’)
평양에서 개최된 조선물산장려선전 행렬 모습(1928년 1월 28일 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삼일운동을 기점으로 민족적 지각이 싹트면서 '경제자립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된다. 국권피탈(1910) 이후 일제 자본에 잠식되어가는 우리 생활권을 지켜내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이 운동은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조직체가 결성되고, 서울 조선청년회 연합회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하자 1922년 말부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군산 기생들도 앞장서 참여하였다. 한호예기조합 기생들은 1923년 2월 10일 총회를 열고 '외국직물 비매동맹회(外國織物 非賣同盟會)'를 구성한다. 이날 임원도 선출한다. 감독에 운선(雲仙), 제1간사 향옥(香玉), 제2간사 춘정(春汀) 등이었다. 12일에는 보성권번 기생들이 개복동 세심관(洗心館)에 모여 '토산장려겸 단연회(土産獎勵兼 斷煙會)'를 조직한다.


'외국직물 비매동맹회' 결성 취지는 그해(1923) 정월 초하루(음력 설날)부터 외국 직물은 구매하지 않고 조선토산직물(朝鮮土産織物)로 의복(衣服)을 제조(製造)하여 입자는 맹세였다, 만일 회원 중 외국 직물을 매입하면 2원, 담배 피우다 적발되는 경우 임원은 5원 회원은 1원의 과태금(過怠金)을 징수, 저축했다가 언제든지 공공사업에 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군산 보성예기치옥(보성권번) 기생들의 토산품 장려와 단연회 조직 관련 기사(1923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
군산 보성예기치옥(보성권번) 기생들의 토산품 장려와 단연회 조직 관련 기사(1923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한호예기조합과 보성권번에서 토산직물 애용 모임 및 단연회가 조직되고 며칠 후 군산에는 새로운 연합 조직이 구성된다. 시내 30여 개 단체 발기로 창설된 '우리물산장려 선전회'였다. 회원들은 장날(음력 1월 14일)을 기해 대대적인 '깃발시위'에 들어가기로 결의한다. 그러나 경찰의 제지를 받는다. 정월 열나흘이 양력 3월 1일이라는 게 불허 이유였다.

각 단체 대표는 다시 회합을 갖고, 협의에 들어간다. 이어 '깃발시위' 예정일을 하루 앞당겨 정월 열사흘로 정하고 선전용 깃발과 현수막을 만드는 등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기생들이 주도한 '토산품 애용 깃발시위'

 1960년대 군산경찰서와 뒷마당(붉은색 타원형)
1960년대 군산경찰서와 뒷마당(붉은색 타원형) 조종안

'깃발시위' 예정일인 정월 열사흘(2월 28일)이 되자 이른 아침부터 각 단체를 비롯해 조선인 상점주인 등 수많은 시민이 깃발을 들고 '경찰서 뒷마당(현 공영주차장 자리)'으로 모여들었다. 거리에는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 '우리 토산으로 물산을 장려하자' 등의 구호가 새겨진 현수막과 깃발들이 물결처럼 나부꼈다.


군산은 며칠째 봄눈이 내리고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눈은 쌓이지 않고 녹으면서 거리는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도 거리 행렬은 오전 11시 정각 아름다운 전통 고악(古樂) 소리를 신호로 시작됐다. 참여자들은 준비해 온 깃발을 들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구복동(九福洞)과 영정(영동)을 지나 영정파출소 앞 너른 마당에 도착하였다.

 군산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 거리시위 알리는 1923년 3월 4일 자 ‘동아일보’
군산에서 열린 조선물산장려 거리시위 알리는 1923년 3월 4일 자 ‘동아일보’ 동아일보

"군산시내 이십여 단체의 발기로 조직된 '우리물산장려선전회'에서는 (중간 줄임) 당국의 제한한 오십여 명의 각 단체 대표 중 선전위원 열 사람은 일제히 토목으로 두루마기를 입고 토목 버선에 조선 집석이를 신었는데 더욱 가상한 것은 보성예기(普成藝妓), 한호예기(漢湖藝妓) 이십여 명은 명주저고리 백목치마 버선에 조선 미투리를 신고 수백 명의 군중은 뒤를 이었다···.(줄임)" (1923년 3월 4일 치 <동아일보>)

특히 여덟 폭으로 만들어진 선전기(宣傳旗)에는 '전 조선적으로 모두가 일치단결하자!'는 뜻으로 조선 팔도 특산물이 각각 표기되어 있었다. 선전기 위에는 '우리물산 장려 선전'이라 쓰고 한 폭, 한 폭에 각도의 생산지 지명을 표기하여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여덟 개 도기(道旗)에 표시된 특산물을 지방별로 구분하면 경기도는 강화 반포(江華 斑布), 경상도는 안동 갈포(安東 葛布), 전라도는 전주 우초(全州 牛綃), 충청도는 한산 세저(韓山 細苧), 강원도는 철원 명주(鐵原 明紬), 황해도는 해주 백목(海州 白木), 함경도는 육진 환포(六鎭 環布), 평안도는 안주 항라(安州 亢羅) 등이었다.

 1960년대 영동파출소 앞마당(국민은행 건물은 일제강점기 ‘옥구금융조합’이었음)
1960년대 영동파출소 앞마당(국민은행 건물은 일제강점기 ‘옥구금융조합’이었음) 군산시

영정파출소 앞마당에서 참가자들에게 행사 취지를 설명한 후 다시 행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정거장 통(대명동)으로부터 빈정(賓町·해망로)에 이르러 재차 취지를 설명하고 명치정(중앙로 1가) 경찰서 앞을 지나는 등 조선 사람이 사는 길목은 모두 들렀다. 이때 군중은 수천에 달하였다. 이후 개복동 넓은 마당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고 '우리는 우리 것으로 살림해야 한다!'는 구호를 외친 뒤 해산하였다. 이때가 오후 3시였다.

'민족의식 뚜렷한 전통문화예술 지킴이'

물산장려운동이 한반도 전체로 확대될 즈음 "무엇이든지 조선 사람이 만들면 으레 좋지 못한 줄 알고, 조선인 상점에 놓인 물건이면 가치 없이 보는 심리와 정신 가지고는 조선인 제조업은 발전할 수 없다"며 "물산을 장려하기보다 정신을 장려해야겠고, 습관 개량보다 심리 개량이 더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칼럼이 눈길을 끈다.

민족 경제 자립을 도모하고, 일제 착취에 저항하기 위해 시작된 물산장려운동, 이 운동은 토산품 애용, 물자 아껴 쓰기 등 여러 방식으로 전개됐다. 그즈음 '토산애용부인회'가 출범하고 시위가 확산하자 일제는 거리 행진을 금지한다. 옥외집회는 법령 위반이고, 온갖 풍설(風說)로 조선인 단체들 사상이 악화하여 불온한 사태를 일으킬 염려가 있다는 게 불허 이유였다.

참가 인원을 제한하고, 시위대를 감시하는 등 일제의 밀착 감시와 탄압에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군산 기생들. 그들은 식민치하라는 모순된 구조 속에서도 가슴에 맺힌 한(恨)과 울분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명주 저고리에 백목(白木) 치마 차림으로 시위를 주도한 기생 20여 명은 민족의식이 뚜렷한 전통 문화예술 지킴이자, 실천가였음을 말해주고 있음이다.

 연극에 출연한 군산 기생들
연극에 출연한 군산 기생들 장금도
참고문헌
<군산해어화 100년>(2018), 1920년대 <동아일보>, <조선일보>
덧붙이는 글 필자는 2018년 <군산해어화 100년>(E-book)을 군산문화원을 통해 출간하였고, 개정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보성권번 #한호예기조합 #단연회 #물산장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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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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