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칼을 목에 찬 수운 최제우 대신사 수운 선생은 1864년 1월 20일 대구감영 선화당(宣化堂) 뜰아래서 첫심문이 시작된다. 이때 수운 선생은 큰 칼을 목에 차고 힘겨운 모습으로 끌려와 강제로 무릎을 꿇린다. 그런데 수운 대선생은 형형한 눈빛으로 경상 감사 서헌순, 상주 목사 조영화, 지례 현감 정기화, 산청 현감 이기재 등을 쏘아본다. 이러한 모습을 박홍규 화백이 실감나게 그려냈다.
박홍규
최제우와 제자들을 불시에 체포한 관졸들은 이들을 역적처럼 취급하였다. 모진 고문으로 피투성이가 된 이들을 끌고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전시'했다. 동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용이었다. 이때의 참상을 전해들은 천도교인 김기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수운은 경주... 형산(兄山) 강변의 어떤 나무밑에 얽매어 놓아두었는데 얼굴에는 전면이 피가 되어서 그 모양을 알 수 없으며... 체포된 선사(최수운)는 사다리의 한복판에 얽어매어 두 다리는 사다리 양편 대목에 갈라서 나누어 얽고, 두 팔은 뒷짐을 지웠고, 상투는 뒤로 풀어 사다리 간목(間木)에 칭칭 감고 얼굴은 하늘을 향하게 했다고 하였다. (김기전, <천도교월보>, 162호, 1924년 3월 15일자)
최제우와 제자 중에서 이새겸만 서울로 압송하고 가족과 다른 제자들은 경주관아에 수감되었다. 서울로 압송 도중에 철종의 승하로 과천에서 며칠 동안 머물다 다시 대구감영으로 송치되었다.
대신사께서는 체포된 후 경주 영천 대구 선산 상주 보은 회인을 거쳐 과천에 당도하였으나 철종의 승하로 인하여 환송하라는 조정의 명에 따라 과천에서 7일간 체류한 다음 충주 조령 문경 상주 선산을 거쳐 이듬해 정월 초 6일 대구감영에 도착하였다. 대구감영에 압송된 대선사는 관찰사인 서현순으로부터 21차례의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당시 참사관으로 배석한 이는 상주목사 조영화, 지례현감 정기화, 산청현감 이기재 등이었다.(<동학연구(8)>, 277쪽)
조선시대의 형률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국사범의 경우는 더욱 심했다. 당시 민란의 주모자나 그 가족, 천주교인 등 수천 명이 참수를 당할만큼 무자비하게 처리했다.
1864년 1월 6일(음) 최제우와 이내겸을 대구감영에 수감한 서천순 경상감사는 상주목사 조영화, 지혜현감 정기화, 산청현감 이기재로 하여금 두 사람을 심문토록 하였다. 모두 동학의 세가 강한 지역의 관장들이다.
최제우와 동학에 대해 증오심에 불타고 있던 이들에 의해 21차례에 걸쳐 혹독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고문으로 다리가 부러지는 악형이 계속되었다.
과천에서 대구로 환송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비변사등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비변사에서 제의하기를, 선전관 정운구가 서면으로 보고한 경주의 동학 죄인 최복술 등의 사건에 대하여 묘당에서 제의하여 처결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최가가 비록 두목이라 하나 도당이 이미 번성하였으므로 응당 속속들이 밝혀내야 할 것이다. 거의 천 리나 되는 지역에서 염탐하고 체포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연도가 소란스럽게 될 것이니 딱하다.
최복술 등 두 놈을 포청으로 하여금 본도(경상도)의 감영으로 하송시켜서 경주에 가두어둔 죄인들과 함께 하나하나 그 내력과 소행을 따져보고 경중을 가려 다시 보고하게끔 명령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라고 하였다. 대왕대비가 승인하였다. (<비변사등록>, 고종원년)
포교 중이던 최시형은 교조가 대구감영에 수감된 소식을 듣고 도인들을 찾아다니며 옥바라지 비용을 모으는 등 대책을 서둘렀다. 소식을 들은 많은 도인들이 대구성중으로 모여들었다. 각 지역의 접주들이 중심이 되었다.
최시형은 현풍출신 동학도 곽덕원을 대구감영의 하인으로 분장시켜 교조에게 식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최제우는 최시형이 빨리 이곳을 떠나도록 하라고 명한다.
경상(해월)이 지금 성중에 있는가. 머지않아 잡으러 갈 것이니 내 말을 전하여 고비원주(高飛遠走)하게 하라. 만일 잡히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 번거롭게 여기지 말고 내 말을 꼭 전하라.(<도원기서>)
최제우는 이 자리에서 시 한 수를 읊으며 곽덕원에게 이를 도인들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사실상 최제우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유시(遺詩)이다.
등불(燈)이 밝아 물 위에 아무러한 혐극(嫌隙)이 없고,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동경대전>, '시문편')
조정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없는 죄목을 만들어 씌우려 하지만 혐의를 잡지 못할 것이다. 결국 나는 그들의 손에 죽겠지만 나의 가르침은 마른 기둥 같으니 그 힘은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함축한다.
세계의 성자들은 "높은 이상, 초인적인 의지,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신앙심(황필호)"으로 종교를 창도하고 진리를 설파하다가 당대의 권력에 의해 희생된다. 하지만 "기둥이 마른 것 같으나 힘이 남아 있다."
최제우와 동학에 극도로 적대적인 지방관들로 구성된 심문관들은 경상감사 서헌순의 명의로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최제우의 포교내용이나 <용담유사> 등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 하지 않고 사설(邪說)을 퍼뜨려 민심을 현혹시켰다는 이유를 담았다. 「장계(狀啓)」는 오늘의 검찰 기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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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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