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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이제 이사 가자" 고추 모종 593개의 새로운 시작

씨앗 하나가 자라는 과정, 우리 인생과 다를까?

등록 2026.03.05 15:18수정 2026.03.05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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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모종(별동대-3군-2군-1군) 파종28일차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크기가 다르다. 남편은 이름을 지었다.
▲고추모종(별동대-3군-2군-1군) 파종28일차 같은 환경에서 자라도 크기가 다르다. 남편은 이름을 지었다. 김희

(이전 기사 : 초보 농사꾼 부부가 '싹'을 위해 지극정성으로 한 일 https://omn.kr/2h0k6)

지극정성으로 키운 고추 모종이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를 해야 했다. 품 안의 자식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동안 한 번의 실패를 딛고 재도전한 고추씨 593개가 싹을 틔우고, 떡잎이 나오고, 지금은 본잎이 넉 장 이상 나왔다. 거실 중간에서 키우던 모종은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자리를 옮겨야 한다. 거실에서는 더 이상 키울 수 없다.


제2의 보금자리는 밭에 있는 비닐하우스다. 옮겨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모종이 튼튼하게 자랄 수 있도록 환경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31일 차 되는 모종은 거실 창 너머의 빛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며칠만 더 거실에 둬도 빛이 충분치 못해 웃자라기만(줄기는 가늘고 키만 커지는 것) 할테니 이사 가야 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사면으로 고르게 들어오는 빛을 받아 줄기가 굵어지고 마디가 촘촘해지도록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31일 차 된 모종은 스스로 영양분을 만들고 뿌리를 키워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게 햇빛이다. 더해서 바람도 꼭 필요하다. 거실은 바람의 흔들림이 없지만 이제 모종은 비닐하우스 안에서 전달되는 자연 바람으로 흔들림을 느끼면서 줄기를 더 강하게 만든다. 그래야 밭에 심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을 맞아 견딜 수 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 키운 모종을 사서 작물을 키웠다. 고향으로 귀농해 처음 시작해 본 고추 키우기는 원하는 품종의 모종으로 고추 농사를 지어보고 싶은 남편의 바람으로 시작됐다. 거실에서 고추 모종을 키우겠다는 남편의 호기에 코웃음 쳤는데 덕분에 새삼 많은 걸 느꼈다. 씨앗 하나가 흙을 밀어내며 고개를 내밀고, 적정한 온도와 습도를 마련해주니 잎을 틔우고 자라며 흙 속에서 뿌리내리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느낀 마음의 울렁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를 찾다 보니 뭉클함이 가장 어울린다. 내가 느낀 감정은 뭉클함이다.

국립종자원에 따르면 현재까지 등록된 고추품종이 4천 개가 넘는다. 그중 농가에서 주로 재배하는 고추품종은 100여 가지 정도란다. 기후 환경이 변하고 병충해에 강한 품종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품종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주말 텃밭을 시작으로 몇 해 고추 농사를 지어봤지만 해마다 다른 병충해로 애를 먹었다. 그래서 올해 고추 농사는 남편이 심고 싶은 품종으로 직접 키워보고 싶었던 거다.

치열했던 직장 생활을 뒤로 하고 복잡한 도심을 떠나 선택한 귀농은 거실에 쭈그리고 앉아 트레이에 씨앗 하나씩 넣게 했고 올라오는 모종과 두런두런 얘기하게 해줬다. 서투르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적응기를 거치고 있지만 귀농을 준비하고 시작하면서 들었던 불안감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얘들아, 이제 이사 가자. 큰 집으로 가자." 며칠 전부터 고추 모종에게 거친 세상 밖으로 가야 한다고 미리 귀띔해 줬다. "거실 밖은 험난하단다. 그래도 잘 클 수 있어. 우리가 지켜줄게."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아가 고추모종이 이사올 보금자리, 미니온풍기, 홈캠, 온도계를 준비했다.
아가 고추모종이 이사올 보금자리, 미니온풍기, 홈캠, 온도계를 준비했다. 김희

거실에서 비닐하우스로 가기 위해 미리 챙겨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남편과 나는 또 낑낑대며 머리를 맞댔다. 일단 비닐하우스 안의 낮과 밤 온도차가 커 모종이 적응하지 못하고 냉해를 입을 수 있다. 햇볕이 필요해 이사는 해야 하지만 아기 모종을 무작정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 비닐하우스 안에 작은 비닐 터널을 만들고 바닥엔 열선을 깔고 틈새 열선의 따뜻한 기온이 빠져나갈까 봐 구석구석 꽁꽁 여몄다. 밤 최저기온이 15도는 유지되어야 모종이 적응할 수 있다.

거실에서 온실 속 모종으로 보살핌받다 갑작스런 환경에 노출되면 녀석들이 놀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적응할 수 있도록 온도, 환기, 습도를 꼼꼼히 챙겨야 했다. 며칠 전부터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봐도 밤 온도 유지가 되지 않아 결국 미니 온풍기를 구입했다. 열선을 깐 바닥 온도로는 도저히 훈훈한 공기가 되지 않아서다. 미니 온풍기를 구입해 시험 가동해 보니 밤에 15도가 유지되었다. 이사 채비를 서둘렀다.

고추모종 뿌리 아직은 약한 뿌리지만 이제 햇빛을 받고 쑥쑥 자랄 거다.
▲고추모종 뿌리 아직은 약한 뿌리지만 이제 햇빛을 받고 쑥쑥 자랄 거다. 김희

이번에 이사하면서 모종을 전부 큰 트레이로 가식(밭에 정식으로 심기 전 한 번 더 옮겨 심는 것)하기로 했다. 작은 트레이가 부족해 큰 트레이에 고추 씨앗 몇 개를 키웠는데 깜짝 놀랐다.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는데 작은 트레이와 큰 트레이 모종의 크는 속도가 달랐다.

남편은 큰 트레이에서 자란 녀석들을 '별동대'라 이름 지었다. '별동대-1군-2군-3군'으로 구분해 관리하면서 흙의 양이 씨앗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됐다(같은 날 같은 환경으로 키웠는데도 트레이마다 모종의 크기가 다르다. 아마 식물 LED 볕을 받는 각도, 양 이런 환경들에 따라 다른 것 같다).

 가식한 첫날은 기운이 없다.
가식한 첫날은 기운이 없다. 김희

지난 3일 '별동대-1군'이 1차 이사를 하고 이틀 동안 적응하는 걸 지켜본 후 5일 아침 일찍 2~3군이 뒤이어 이사를 했다. 1차로 자리를 옮긴 '별동대-1군'이 첫날 잘 견딜지 걱정이 되어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 밤새 홈캠만 봤다(비닐하우스 온도 확인을 위해 홈캠 1대를 설치했다). 고추 모종 593개가 거실에서 밭으로 이사하니 좁았던 방 한 칸도 넓어졌다. 식물 LED등으로 받던 볕도 자연광인 햇볕으로 맘껏 받고 흙 밑에서 뿌리들이 생명을 이어갈 거다.

농사를 지으며 우리네 인생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들녘에 씨를 뿌려만 놓으면 수확물을 주지 않는다. 작물마다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살펴줘야 한다. 물이 부족하면 모종은 잎이 처지면서 신호를 보낸다. '물이 부족해요.' 볕이 부족하면 고개를 숙인다. '햇빛이 부족해요.' 그렇게 작은 모종을 살피는 일이 어쩌면 사람 사는 세상의 작은 축소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가 고추 모종을 키우고 살피는 일이 사람에 치이고 쏟아지는 업무에 치였던 지난 삶을 지나고 받은 최고의 보상이라고 남편과 나는 말한다. 어쩌면 고단했던 시간을 잘 살아온 우리 부부는 아직 작고 연약하지만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랄 저 모종에게서 위로받고 치유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뒤로 가는 익어가는 인생 앞에서 만난 더없이 소중한 지금이다.

 밤새 잘 자고 정신 차린 고추모종이 씩씩하다.
밤새 잘 자고 정신 차린 고추모종이 씩씩하다. 김희

"아가들아, 너네가 잘 자라도록 최선을 다할게. 마음껏 자라라."

잘 자란 고추 모종은 4월 18일 야외로 나가 밭에 심게 된다. 올해 고추 농사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고추모종 #고추뿌리 #고추 #모종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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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12월 17일 첫 출근, 25년 12월 17일 마지막 출근 35년간 직장생활을 마쳤다. 이제 나는 자유인이다. 지금은 듀얼라이프, 도시와 시골 반반살기, 지금까지 나를 앞으로 나를 기록하는 글쓰기도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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